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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작가로 소통, 기획자로 밥벌이…일 영역은 확대하기 나름이죠

중앙일보

입력

흔히 팝아트(Popular Art)라고 하면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나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캔’이라는 작품을 떠올립니다. 강렬한 색과 이미지가 특징인 팝아트는 익숙한 이미지나 오브제(객체)를 소재로 쓰는, 너무 익숙해서 주의 깊게 보지 않는 것을 예술가의 개입으로 전혀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게 매력이죠. 앤디 워홀로 인해 우리는 ‘마돈나의 얼굴’처럼 유명인의 얼굴도 작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자유학기제 웹진 꿈트리의 '자기주도진로' 인터뷰 33 프로젝트 디자이너·팝 아티스트 릭 킴

한국에도 앤디 워홀처럼 사람들의 얼굴을 팝아트로 표현하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돈나 같은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죠. 직업인으로서 기획 및 디자이너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면서 팝아티스트 작가의 길을 걷는 릭 킴(40·Rick Kim·김태훈)씨를 만났습니다.

‘회사인’ 10년 하며 재능과 자신 찾기
1999년 스무살 태훈씨는 전북대 미술대학에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입학했어요. 1학년 새내기 시절 유학생들을 돕는 국제교류부 활동으로 다양한 나라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레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죠.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자 진로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죠. 그는 과감하게 전공인 시각디자인 분야 취업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당시 전공분야로 취업한 친구들을 보니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죠. 좋아서 했던 공부나 일이 막상 밥벌이가 되면서 싫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태훈씨는 누구보다 그래픽 디자인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처럼 되기 싫었습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아씨이태원(Artsy Itaewon)'에서. 릭 킴은 2019년 12월부터 2020년 5월까지 6개월간 예술가의 작업실 겸 커뮤니티 공간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아씨이태원(Artsy Itaewon)'에서. 릭 킴은 2019년 12월부터 2020년 5월까지 6개월간 예술가의 작업실 겸 커뮤니티 공간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시각디자인 전공을 살려 취업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죠. A4용지에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 잘 못 하는 것, 싫어하는 것, 관심 있는 것 등 리스트를 쭉 정리해봤어요. 분석해보니 제가 미디어 영상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당장 도전에 나선 그는 대학 3학년이던 2005년 전주지역 민영방송인 JTV에서 FD(연출 보조)로 방송 일을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TV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면서 미디어의 현실적 한계를 느끼고, 방송 제작진은 때로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진실과 거짓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결국 이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서울 홍대 앞 편집숍 'object'에서 컵드로잉을 비롯한 릭의 다양한 작품을 2013년 1년간 상설 전시했다.

서울 홍대 앞 편집숍 'object'에서 컵드로잉을 비롯한 릭의 다양한 작품을 2013년 1년간 상설 전시했다.

또 한 번 빈 A4용지에 자신을 찾는 작업이 시작됐어요. 이번에는 자신이 일본어를 잘하고 뭔가 일을 꾸미는 것, 즉 기획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이 두 가지 재능을 바탕으로 2007년 게임회사 웹젠에 입사해 일본 로컬라이제이션 개발 PM을 맡았죠. IT 전공자가 아닌 그에게 게임회사는 낯선 세계였어요. 입사 후 첫 회의에선 대화의 절반 이상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죠. 평소 게임을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기본적인 게임용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6개월간 밤을 새우며 몰입한 덕분에 일본 론칭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낸 경험은 태훈씨가 게임·미디어산업에 대한 이해를 키우는 과정이었죠. 자신감을 바탕으로 2009년 10월엔 엔씨소프트로 이직했어요. 당시 ‘내가 하면 잘할 것 같은’ 포지션의 채용공고가 떴기 때문입니다. 비주얼 기획자와 게임 콘텐츠 기획자로 5년간 ‘리니지2’와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했죠.

내 안의 아이디어 ‘사이드프로젝트’로 풀어
‘직장인’으로 사는 10년 동안 경제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마음 한 편은 즐겁지 않았어요. 태훈씨의 머릿속에는 달리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때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거나 차곡차곡 메모해 뒀어요. 어느 날 그것들을 어디엔가 풀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2012년 1월 1일 0시 15분. 가까운 친척의 임종을 홀로 지키며 새해 첫날을 영안실에서 맞게 된 거죠. 몇 시간만 병실을 지키면 될 거라 가볍게 생각하고 갔던 그로선 엄청난 쇼크였어요.

2018년 12월 크라우드 펀딩 와디즈에서 진행했던 '내가 사랑하는 얼굴' 전시회에서.

2018년 12월 크라우드 펀딩 와디즈에서 진행했던 '내가 사랑하는 얼굴' 전시회에서.

“그때 진지하게 ‘나한테도 내일이 없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날 이후에도 야근 후 택시를 타는 일상이 계속됐지만 예전과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죠. 이렇게 일만 하다가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만일 죽으면 뭐가 아쉬울까 자주 생각하게 됐어요.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한 나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젠 그것들을 세상에 풀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2013년 1월, 회사에 담당 업무 변경을 요청하고 6개월간 대기발령을 받았습니다. 운 좋게도 이 기간 일하지 않고도 월급을 받게 돼 시간적 여유가 생겼죠. 그래서 가장 먼저 해보고 싶었던 일부터 시작했어요. ‘프로젝트 페이스 드로잉(이하 프페드)’, 모르는 사람들의 페이스 드로잉(face drawing)을 그려주는 겁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하며 마스크를 쓴 모습의 자화상을 그렸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하며 마스크를 쓴 모습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가 계획한 ‘프페드’의 과정은 이래요. 페이스북으로 의뢰받아 관찰·인터뷰를 통해 모델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해 그린 후 완성 작품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태그를 걸어 올려주면 끝.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림 그려주기를 좋아하는 태훈씨의 자발적인 활동이라 무료였죠. 2월부터 개인 페이스북으로 신청자를 받았는데 입소문이 나며 대기자가 200명을 넘어섰죠. 100여 장이 넘는 페이스 드로잉 작품이 나왔고, 5~6월엔 그의 그림을 본 영국인 친구의 제안으로 온라인 그림을 캔버스로 출력해 영국 런던에서 첫 번째 개인전도 열었어요.

이를 계기로 ‘프페드’의 후속 과정이 생겼죠. 신청자들에게 캔버스로 출력한 작품의 구입의사가 있으면 판매해 보기로 한 거예요. 판매 과정에서 그냥 그림만 전달하는 것은 왠지 재미없게 느껴졌죠. 청담동의 작은 전시공간을 빌려 팝업 전시회를 열고 그를 아는 뮤지션들이 동참해 파티가 됐습니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전시회에 와서 작가와의 만남 후에 그림을 가져가게 했죠. 그의 첫 사이드프로젝트 ‘프페드’의 전 과정은 이렇게 완성됐어요. 이때부터 태훈씨는 릭 킴(Rick Kim)이라는 이름의 아티스트로 활동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에 주목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 아는 유명인의 얼굴이 아니라 내 가족·친구·연인 등 평범한 얼굴들이 아닐까 생각해봤어요. 사실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경우가 드물죠. 그래서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작품으로 만들어 자신의 얼굴이 전시되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2016년 6월 '아트센터 나비'에서 'InterFACE' 전시를 진행하고 애프터 파티를 열었다.

2016년 6월 '아트센터 나비'에서 'InterFACE' 전시를 진행하고 애프터 파티를 열었다.

2013년 6월 퇴사 후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해 11~12월에는 SK아트센터 나비의 요청으로 미디어아트 ‘얼굴을 만나다, 세상을 만나다-첫 번째이야기전’에 도전했고, 2014년 10~12월에는 서울 강남구청과 함께 강남 미디어폴 미디어아트 ‘얼굴을 만나다, 세상을 만나다-두 번째 이야기’ 개인전을 진행했죠. 여러 번의 그룹전시회에 참여하며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했어요.

2015년에는 회사를 설립해 여러 명의 직원과 함께 일하기도 했지만, 2017년부터는 다시 1인기업가로 돌아와 프리랜서 그룹과 자유롭게 협업해요. 2018년 11~12월엔 와디즈로부터 ‘프페드 in Wadiz 프로젝트를 제안 받아 펀딩 목표치의 350% 이상 모금액을 달성하기도 했죠. 놀라운 사실은 작업 의뢰인의 90%가 태훈씨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죠. 12월 19~25일 합정동 페이머스 그라운드에서 ‘내가 사랑하는 얼굴’ 개인전도 개최했어요. 2019년에는 경기도 전역 50여 곳 이상 마을공동체 공간 조성 담당자를 대상으로 커뮤니티 디자인 컨설팅 강연 워크숍을 진행했죠. 이후 개인의 얼굴을 넘어 회사의 얼굴인 '브랜딩(B.I)' 작업까지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2020년 4월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난임전문병원인 'HI여성의원'에서 직원을 대상으로 인터널브랜딩 강의하는 모습.

2020년 4월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난임전문병원인 'HI여성의원'에서 직원을 대상으로 인터널브랜딩 강의하는 모습.

“저는 현재 프로젝트 디자이너와 팝 아티스트, 2가지 일을 동시에 해요. 최근엔 하나의 직업이나 전공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저 같은 사람을 프리키(Freekey·자유로운 열쇠)라고 부릅니다. 저에게 작가 활동은 일종의 미디어, 즉 사람들과 소통하는 수단이지만 아직 작가 활동으로 큰 돈을 벌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프로젝트 디자이너(기획자)로 불러줘서 수입 측면에서는 예전 월급쟁이 시절 못지않죠.”
그는 미래 직업세계의 변화상에 맞는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청소년에게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경기도 마을공동체 지원센터의 요청으로 2017년 8월 위례신도시 커뮤니티 디자인에 대해 컨설팅을 했다.

경기도 마을공동체 지원센터의 요청으로 2017년 8월 위례신도시 커뮤니티 디자인에 대해 컨설팅을 했다.

“청소년 사이에 금수저·은수저·흙수저로 계층을 구분하며 무기력함이 대세가 된 것 같아요. 제가 지난 7년간 회사 바깥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해보면 세상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곳이고 정리되지 않는 혼돈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이에요. 아직 구현되지 않은 좋은 것들이 많아서 내가 능력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겁니다. 그렇게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관심사가 확장돼요.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다 가는 삶은 재미없잖아요? 스티브 잡스처럼 내가 만든 것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함으로써 유익을 얻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 아닐까요.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고 싶어하니까요.”
글=김은혜 꿈트리 에디터

※’자기주도진로’ 인터뷰는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행하는 자유학기제 웹진 ‘꿈트리(dreamtree.or.kr)’의 주요 콘텐트 중 하나입니다. 무엇이 되겠다(what to be)는 결과 지향적인 진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겠다(how to live)는 과정 중심의 진로 개척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틀에 박힌 진로가 아닌,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진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현재의 성공 여부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고, 남들이 뭐라 하든 스스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길’을 점검해 보길 희망합니다. 꿈트리 ‘자기주도진로’ 인터뷰는 소년중앙과 협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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