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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밥그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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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준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하준호 정치팀 기자

하준호 정치팀 기자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일에 치여 짬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밥은 먹고 하자”면서다. 밥은 그렇게 중요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한다. 교무실 바닥을 대걸레로 훔치다 넋을 놓고 운동장 쪽을 바라봤다. 알록달록한 종이비행기 수백개가 운동장 바닥에 착륙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학생부장 선생님의 지시로 영문도 모른 채 종이비행기를 치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종이비행기 사건의 원인은 급식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학교에 납부하는 급식비만큼 양질의 급식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거기에 학교 이사장 측이 급식비의 일부를 횡령한 의혹까지 번지자 선배들이 집단행동을 결의했다고 했다. TV 시사프로그램에도 소개된 선배들의 ‘종이비행기 시위’의 끝은 급식 질 개선이었다. 급식비는 같았지만 반찬이 하나 늘었고, 학교는 안정을 되찾았다.

얼마 전 모 방송에는 5년간 같은 장소에서 괴성을 지른다는 한 남성이 소개됐다. 큰 확성기 탓에 그 주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급기야 한 주민은 그 남성 앞에 차를 세우곤 경적을 끊임없이 울려대며 항의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남성에게 손가락질하기 바빴지만, 누구도 그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밥그릇은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중앙포토]

밥그릇은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중앙포토]

취재 나간 PD가 대신 다가가 물었다. 그랬더니 그 남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 “밥”이었다. 자신이 일하는 버스회사가 기사들에게 제공하는 식단이 지나치게 부실하다는 주장이었다. 그가 제시한 사진 속 식단에는 김밥 6알과 약간의 단무지·깍두기가 있었다. 어느 날 식단에는 빵과 우유만 달랑 나왔다. 그는 불편을 호소하는 주민들의 인터뷰를 보곤 시위를 중단했다고 하지만, 버스회사가 식단을 개선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의대 정원을 늘리고 지방에 공공의대를 설립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의사들이 집단 휴진의 방법으로 저항하자 “기득권이 밥그릇 지키기에 혈안이 됐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국가시험 응시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의대생의 SNS에는 “개뿔도 한 거 없으면서 지들이 세상을 구한 것처럼”이라는 조롱성 댓글이 달렸다.

“나는 지금 사태를 의사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폄하하는 것에 반대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밥그릇’이기 때문”이라는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지방의 의대생이 대학병원 수련의 대신 수도권 피부과·성형외과에서 일반의로 의사 생활을 시작하는 현실이 결국 ‘페이(pay)’, 즉 밥그릇 때문임을 직시하지 않는 것 같다.

코로나19비상시국에 무책임하게 가운을 벗는 의사들을 비난하지 않을 순 없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결정이어서다. 그런데 이왕지사, 생명을 다루는 의료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도 됐으면 한다.

하준호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