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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전 출근통보…폰만 보는 '5분 대기조' 조폐공사 비정규직

중앙일보

입력

“하루 종일 휴대폰만 붙잡고 있습니다. 내일 출근해도 된다는 연락 기다리느라...”

한국조폐공사 ID본부에서 여권을 제작하고 검수하는 비정규직 A씨는 본인을 ‘하루살이 노동자’라고 하소연했다. 다음날 출근 여부를 하루 전 저녁에 통보 받는다는 것이다. A씨는 27일 “일이 많고 적음에 따라 공사가 부르는 인원이 그날 그날 달라진다”고 말했다. 지난 4월 A씨의 출근 일수는 4일이었다.

‘나오세요’ ‘쉬세요’ 하루 전 통보

네이버밴드를 통해 하루 전 출근 여부를 통보하는 한국조폐공사. [용혜인 의원실 제공]

네이버밴드를 통해 하루 전 출근 여부를 통보하는 한국조폐공사. [용혜인 의원실 제공]

한국조폐공사는 지난해 기준 정규직 여성 평균 연봉이 8557만원으로 36개 공기업 중 1위다. 평균근속연수도 1위다. 그러나 이런 ‘신의 직장’에서 여권발급부 소속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전원은 ‘하루살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공사 측은 여성 비정규직들과 근로계약 체결 이후에도 출근 일수를 별도로 정하지 않았고 출근 가능 여부를 하루 전에 통보하고 있다. 이러한 ‘하루 전 출근 통보’는 2008년부터 12년간 이어져왔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전화나 문자를 통해 출근 가능 여부를 통보받은 이후에서야 다음날 하루 일할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네이버 밴드를 통해 ‘나오세요’ ‘쉬세요’라는 문구를 통해 출근 여부를 통보했다. 올해는 ‘근로계약 미성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해 노동자들의 출근 일수는 대폭 줄었다. 여권 발급량이 줄어 일감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일용 근로자 출근현황’에 따르면 지난 26일에는 전체 36명 중 출근한 인원은 단 6명뿐이다. 여권발급부에서 일했던 B씨는 “지난 2월부터 4개월 간 출근 일수가 한 달이 채 안 된다”며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지난달에 퇴사 후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대우는 일용직, 계약서는 무기한

이러한 ‘하루 전 출근 통보’의 이면에는 공사 측의 이해하기 어려운 근로계약서가 자리잡고 있다. 공사 측은 “여권은 당일 발급해야할 물량이 매일 다르기 때문에 작업량이 유동적”이라며 “다음날 작업규모를 미리 특정할 수 없어 일용 근로자 운용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공사 측 입장대로라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형태는 ‘일용직’인 셈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작성한 근로계약서는 그렇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입사 후 작성한 근로계약서에는 일용직이 아닌 상시적 업무에 적용되는 주휴수당·연차휴가수당 규정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근로기간과 계약기간은 별도로 명시되지 않았다. 일용직이라면 출근하는 날에 맞춰 매일 근로계약서를 새로 작성해야 한다.

박현수 노무사는 “실질적으로 근로관계가 일정기간 동안 공백 없이 계속 유지되어 왔다면 사실상 기간제 근로자 또는 상용 근로자로서 지위가 인정될 수 있다”며 “정당한 이유 없이 ‘일용직 근로자’라는 사유만으로 근로제공을 거부하는 것은 근로기준법 위반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불법계약 족쇄로 작용

이러한 모순적인 근무형태는 노동자들에게 족쇄로도 작용했다. 출근을 하지 못해도 근로계약상 4대 보험에 가입해 있는 등 고용이 지속됐기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조차 구할 수 없었다. 여권발급부 소속 노동자 C씨는 “공사 측에서는 출근을 안 하는 평일에도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면 안 된다고 했다”며 “언제 출근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약속도 못 잡고 집에서 그저 출근 통보만 기다리는 ‘5분 대기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편법 쪼개기 계약까지

한국조폐공사 ID본부 여권발급부에서 9년간 일해온 송모씨의 국민연금 가입기록. [송씨 제공]

한국조폐공사 ID본부 여권발급부에서 9년간 일해온 송모씨의 국민연금 가입기록. [송씨 제공]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공사가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해 편법 쪼개기 계약을 해왔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2011년 3월에 입사한 송모(43)씨는 9년간 공사에서 일하면서 입사만 4번을 반복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 후 22개월이 지났을 떄 공사가 계약해지를 요구해 사직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송씨의 ‘국민연금 가입증명’에는 2011년·2014년·2016년·2018년에 국민연금 가입 자격을 새로 취득한 기록이 남아있다. 사업장은 모두 ‘한국조폐공사 ID본부’로 동일했다. 송씨는 “문재인 정권 들어 정규직 전환 기대도 있었고 고용 조건이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며 “하지만 2년을 채우기 전에 회사 간부로부터 암묵적으로 퇴사 종용을 받고 사직서를 내는 걸 똑같이 반복했다”고 말했다.

공사 측 “일용직 맞다”

공사 측의 이같은 ‘꼼수 재계약’은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과도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조폐공사는 2020년 7월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사문화 우수기업 인증’을 받았다. 조폐공사의 불법 근로 계약 문제를 공론화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2년 고용기간을 채우기 전에 재계약을 반복하는 것은 정규직 고용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민간기업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수법”이라며 “공공기관이 극단적인 고용유연화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폐공사는 여권발급부 소속 노동자들에 대해 “일용직이 맞다”는 입장을 보였다. 공사 측은 “근로계약서를 교부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며 “차세대 전자여권 도입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들은 한시적 직무를 수행하고 있어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코로나19로 인한 휴업일수 증가에 대해 처우개선 방안을 마련했다”며 “논란이 되는 이들의 고용형태에 대해서는 법률적 검토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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