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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박원순 떠나도 위력의 그물망은 남아 진실 흔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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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시장 변사사건 50일째 미궁

작고한 박원순 서울시장(왼쪽)의 생전 모습. [뉴시스]

작고한 박원순 서울시장(왼쪽)의 생전 모습. [뉴시스]

박원순의 죽음에 두터운 구름이 깔려 있다. 변사 사건의 진실이 이렇게 오랫동안 가리워진 적은 없었다. 7월 10일 북악산 성곽길에서 시신이 발견된 이래 그의 최후에 관한 비밀은 50일째 풀리지 않고 있다. 기자가 작고한 박원순 시장의 자살을 ‘비밀’이라고 한 이유는 변사 기록이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성완종·노회찬 때는 기록 즉시 공개 #경찰, 포렌식 핑계 말고 중간발표를 #성추행 진실 쥐고 있는 20명 참고인 #비서실장이 가이드라인 주면 안 돼

자연사든 타살이든 자살이든 시민의 죽음은 국가가 승인함으로써 완성된다. 이는 사람의 탄생을 국가가 승인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국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등 6하원칙에 따라 기술된 변사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시민의 죽음을 입증한다. 시민의 죽음을 감추는 권력은 역사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대가를 치렀다. 사람들은 죽음의 증명 과정을 경험하면서 국가와 법이라는 존재의 엄연함과 공동체에서 한 시민의 탈락을 받아들인다. 변사 기록의 공개는 국가의 의무에 해당한다. 이 절차가 생략되거나 지연되면 법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사람들은 서로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된다.

그런데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은 서울경찰청 형사과장인 최익수 총경이 7월 10일 새벽 2시 기자들에게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현재로선 타살 혐의점은 없어 보인다. 향후 변사사건 절차에 따라 수사를 진행하겠다”는 요지의 브리핑 외에 공개된 것이 하나도 없다. 기자 간담회는 변사 기록이 아니다. 그날 최 총경의 회견 내용에 따르면 박 시장의 숨진 시각은 “현재 CCTV로 분석 중”이고 숨진 장소는 “숙정문과 삼청문 중간 정도”이며 숨진 상태는 “고인과 유족의 명예 때문에 그런 거는 (답변) 못한다”이다. 숨진 이유 역시 “고인과 유족의 명예 때문에 구체적으로 확인해 줄 수 없다”로 나타났다. 변사 정보가 부실하고 미진하다.

성추행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 [연합뉴스]

성추행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 [연합뉴스]

고인과 유족의 명예 문제는 박 시장 이전의 여러 유명인 자살 사건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이번 경우 유독 사회적 침묵을 강요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부엉이바위 자살 때는 사건 당일 바로 사망 시간과 장소, 상태가 현미경처럼 드러났다. 2015년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북한산 자락에서 목을 매거나, 2018년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아파트에서 투신했을 때에도 사건이 발생한 날, 6하원칙에 따라 명확하게 기술된 변사 보고서가 공개됐다. 성완종 회장 사건에서 경찰이 가슴에 품은 쪽지의 존재를 감춰 논란이 일었으나 이튿날 검찰이 공개함으로써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한 정치권 로비 수사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시민의 죽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은폐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법치 국가의 작동 원리다.

박 시장 자살의 경우, 성추행 혐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특수한 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국민의 알권리가 지나치게 제한받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죽음에 관한 브리핑 정보가 워낙 부실하고 미진한 데다 미확인 상태가 50일째 이어지고 있다 보니 시중에선 ‘박원순 시장이 자살한 것 맞느냐’ ‘시신의 형태가 어떤 모습이었나’ ‘박 시장과 마지막 만남과 전화를 했던 고한석 비서실장은 어떤 얘기를 나눴나’를 비롯해 차마 지면에 옮기기 어려운 흉흉한 얘기들이 꼬리를 물고 퍼져가고 있다. 이런 비정상 상황은 문재인 정권이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 하루빨리 해소할 필요가 있다.

박원순 변사 사건을 브리핑했던 최익수 총경한테 변사 보고서가 공개되지 않는 이유를 최근 물어보았다. 최 총경은 “내부 지휘 라인에겐 다 보고했다. 다만 사망에 이르는 경위를 수사하기 위해 박 시장의 휴대폰을 포렌식해야 하는데 유족의 중단 요청을 법원이 받아들이는 바람에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포렌식이 안 되면 안 된 대로 중간 수사결과라도 발표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다시 질문하자 최 총경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경찰은 국민 저변에 퍼진 박원순 변사에 대한 불신과 의혹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결국 김창룡 경찰청장이 납득할만한 대안을 내놔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박원순이 생전에 여비서를 상대로 위력에 의한 성추행을 했느냐 하는 점은 모든 문제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다. 실체적 진실은 박 시장이 아무런 답변이나 해명을 남기지 않은 채 자살함으로써 미궁에 빠졌다. 대신 서울시청 6층 비서실 사람들이 박 시장의 성추행 행동을 알고도 방치했는지를 가리는 수사에 의해 진실의 일부가 드러날 듯하다.

성추행 방조 혐의의 수사 지휘자는 서울경찰청 여성청소년 과장인 이길호 총경이다. 이 총경은 7월 8일 오후부터 9일 새벽까지 김재련 변호사와 동행한 피해자로부터 고소인 진술을 받은 부서의 책임자이다. 그는 ‘왜 이리 실체 규명이 더디냐’는 질문에 “통상 고소 사건의 처리 기간은 두 달이고 필요하면 한 달 더 한다”며 장기전을 예상했다. 이길호 총경은 “피해자가 성추행 문제와 관련해 인사 고충을 호소한 사람이 20여명이 된다. 조사에 시간이 걸린다”라며 “우리가 이 사건을 직접 접수했기 때문에 검찰의 수사 지휘는 받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은 7월 7일 피해자 측으로부터 고소와 관련한 면담 요청을 받았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취소하는 바람에 성추행 수사에 대한 의지를 의심받고 있다.)

문제는 피해자가 박 시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비서로 재직한 시기(2016~2019년)에 네 명의 비서실장 즉, 서정협→허영→김주명→오성규씨가 피해자 고소의 주요 내용을 부인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왜 문제일까. 이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피해자는 성추행을 당하지 않았고, 박원순 시장이 왜 자살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피해자는 상상 속에서 추행을 당한 것이며 피해자의 상상 때문에 박 시장이 목숨을 끊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로 귀결된다. 현재 서정협씨(현 서울시장 직무대행)와 허영씨(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는 경찰에 소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주명씨는 “피해자로부터 전보 요청을 받은 사실이 없다”(8월 13일)고 경찰에서 밝혔고, 오성규씨도 조사를 받으러 들어가면서 “피해 호소 사실을 전달받은 바가 전혀 없다. 최근까지 참고인 조사를 받은 20명에 달하는 비서실 직원들은 누구도 피해자의 피해 호소를 전달받은 사례가 없다”(8월 17일)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피해자 측은 이미 피해자와 그 위의 주임, 인사담당 과장, 비서실장, 서울시장 등으로 연결되는 성추행 호소와 관련된 숱한 텔레그램 상의 대화 내용을 증거물로 내놓았음에도 일부 비서실장들이 입을 맞춘 듯 부인하는 태도에서 권력의 압박이 작동되고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우선 오성규씨의 발언은 개별적으로 수사 보안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할 20명의 비서실 직원들에게 진술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여전히 서울시청 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전직 비서실장들(그중의 한 명은 서울시장 직무대행이다)이 비서실 출신 공무원들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얘기다. 박원순 시장은 피해자 입장에선 성추행 가해범이다. 가해자는 떠나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위력의 그물망은 남아 피해자의 진실 규명을 흔들고 있다.

윤석열, 이성윤 고발사건을 김후곤에 배당

윤석열(左), (右)김후곤

윤석열(左), (右)김후곤

박원순 사망과 관련해 풀려야 할 핵심 문제로 서울중앙지검 간부들의 공무상 비밀누설, 직무유기 의혹을 빼놓을 수 없다. 성추행 피해자의 경찰 고소가 있기 하루 전인 7월 7일, 피해자의 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가 서울중앙지검의 유현정 부장검사(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게 전화를 걸어 박 시장을 고소할 예정이라며 면담 약속을 잡았지만 몇 시간 뒤 유 부장이 이를 취소한 사건이다. 뒤늦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7월 25일 활빈단 등 시민단체들이 유 부장검사와 상부 보고 라인인 김욱준 4차장 검사, 이성윤 중앙지검장을 고발했다.

활빈단은 “유 부장검사의 이례적인 면담 취소는 이성윤 지검장의 판단으로 보인다. 이 지검장이 관련 내용을 윤석열 검찰총장을 건너뛰어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이는 고소 사실이 가해자인 박원순 시장 측에 새나가 증거인멸, 협박, 회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능케 한 범죄”라고 주장했다.

검사가 검사를 수사해야 하는 이성윤 등 고발사건은 8월 25일 김후곤 지검장의 서울북부지검에 배당됐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한 달을 고심하다 내린 결정이다. 김후곤 지검장은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청문회준비단장 경력도 있지만 요즘 법무부의 섣부른 검찰 개혁에 비판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친정권 성향도, 친윤석열 성향도 아닌 것으로 평가된다. 김후곤의 이성윤 다루기가 감상 포인트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