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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폭주하는 부동산 세금, 납세자의 삶 훼손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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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부동산세 폭증의 정치적 결말

정부의 고강도 규제에 서울의 아파트 거래는 급감했지만, 강남권 아파트는 연일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가 투기를 잡겠다며 부동산 세금을 올려 부동산 소유자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뉴스1]

정부의 고강도 규제에 서울의 아파트 거래는 급감했지만, 강남권 아파트는 연일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가 투기를 잡겠다며 부동산 세금을 올려 부동산 소유자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뉴스1]

“내가 워런한테 말했어요. 재산세 얘기 한 번만 더 하면 쪼그려뛰기 500번이라고요.”

자산의 80%인 부동산 세금 올리면 개인의 삶 힘들어지는데도 #거대 여당, 부동산 입법 졸속 처리하며 실질적 내용은 팽개쳐 #미국선 과격한 시장 개입이 광범위한 납세자 저항 불러 #20년 이어진 민주당 천하 깨지고 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 열기도

미스터 유니버스 출신의 터미네이터, 그리고 8년에 걸쳐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2003년 주지사에 처음 출마했을 때 일이다. 경선이 시작된 직후 워런 버핏은 슈워제네거 지지를 선언하고 그의 경제정책 자문위원이 됐다.

버핏은 시가총액 기준 전 세계 기업 순위 10위 안에 드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최대 주주로, 제프 베이조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에 이은 세계 4위의 부자다. 또 거품에 휩쓸리지 않는 가치 중심 투자, 서민들과 어울려 맥도널드에서 아침 식사를 즐기는 검소함, 본인이 내는 세금을 올려 빈부 격차를 줄여달라는 사회 공헌 등으로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거물이다.

게다가 그는 기업인들이 수백만 달러의 정치 자금을 내는 일이 흔한 미국에서 1000달러가 넘는 정치적 후원을 한 적이 없었다. 전통적 민주당 우세의 캘리포니아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슈워제네거에게 민주당 성향으로 분류되는 버핏의 합류는 천군만마였다.

재산세 폭증에 분노한 캘리포니아 주민

2003년 8월 20일 버핏은 슈워제네거를 위해 경제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와 10년 뒤 노벨 경제학상을 받는 시카고대 경제학 교수 유진 파마 등 21명의 초호화 패널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기자가 버핏이 제안한 재산세 인상안에 대해 묻자 슈워제네거는 ‘쪼그려뛰기 500번’ 운운하며 절대 반대 입장을 밝혔다. 버핏이 그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를 생각하면 모욕적 발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야기는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0년대 내내 지속된 높은 인플레이션과 인구 증가로 인해 캘리포니아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그에 맞춰 이뤄지는 부동산 가치 재평가로 재산세도 턱없이 올라갔다.

가장 큰 문제는 수입이라고는 연금밖에 없는 주민들이었다. 집값이 오른다고 현금이 되는 것이 아니니 재산세를 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일부는 세금을 못 내 수십 년 살아온 집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분노한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주민 투표를 통해 이제는 전설이 된 ‘주민발의안 13호’를 통과시키고 주 헌법을 개정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左), 워런 버핏(右)

아널드 슈워제네거(左), 워런 버핏(右)

이 발의안에 따라 부동산에 대한 종가세(가치에 비례하는 세금)는 현금 가치 총액의 1%를 넘을 수 없게 됐다. 과세 기준이 되는 부동산 가치 평가는 76년 가격에 고정되고 세금 인상률은 해마다 물가상승률을 넘을 수 없으며 최대 2% 한도 안에서만 올릴 수 있다.

주택 소유주가 바뀌거나 신축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동산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은 금지됐다. 주민발의안 13호는 미국 정치에서 ‘제3 레일’이라 불린다. 기차 레일은 두 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세 개다. 세 번째 레일은 고압 전기를 공급하는 송전용이다. 제3 레일을 건드리면 저승길이 눈앞에 보인다. 슈워제네거는 버핏에게 아무리 큰 신세를 졌다 한들 저승길을 택할 수는 없었다.

그럼 버핏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의 제안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세 채의 주택을 예로 들었다. 첫 번째 집은 그가 70년대 초반 구입한 캘리포니아 주택이다. 2003년 기준 시장가격은 약 400만 달러인데, 주민발의안 13호에 따라 76년 가격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기 때문에 연간 재산세는 2264달러에 불과했다. 90년대 중반에 구입한 두 번째 집은 첫 번째 집과 나란히 붙어있는데 시장가격은 약 200만 달러로 첫 번째 집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재산세는 1만2002달러로 다섯 배가 넘는다. 구입시점인 90년대 중반 가격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기 때문이다. 세 번째 집은 캘리포니아보다 훨씬 시골인 오마하에 있었다. 시장 가격은 약 50만 달러로 첫 번째 집의 8분의 1에 불과하지만 재산세는 1만4401달러로 오히려 여섯 배를 낸다. 오마하는 주민발의안 13호 같은 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버핏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첫 번째 집과 두 번째 집 사이의 불공정이었다. 가까스로 생애 첫 내 집을 마련하는 서민들에게 더 높은 세금을 받아 오래전부터 집주인이었던 부자의 세금 부담을 덜어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세상은 첫 번째 집과 세 번째 집의 차이에 주목했다. 평생 투기 한 번 안 하고 같은 집에서 수십 년 살아온 은퇴자들이 안정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세상과, 연금 말고는 수입도 없는데 50만 달러(약 6억 원)짜리 집에 산다고 해마다 1만4000달러(약 1700만원)씩 세금을 내야 하는 세상 중에서 전자가 훨씬 낫다는 것이 납세자들의 판단이었다.

사회 통합과 개인 삶의 무게 고루 존중해야

버핏도 정의고, 주민발의안 13호도 정의다. 버핏은 빈부 격차를 줄이려는 ‘형평의 정의’고, 주민발의안 13호는 성실한 납세자의 삶의 무게를 존중하려는 ‘인정의 정의’다.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형평의 정의보다 인정의 정의가 우선한다는 것을 ‘제3 레일’이 말해준다. 오마하의 현인조차 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쪼그려뛰기 500번’이라는 ‘감전’을 당해야 했다.

그러면 형평의 정의는 속절없이 내팽개쳐진 것일까. 92년 제기된 위헌 소송에서 미국 대법원은 합헌 판결을 내렸다. 지역 공동체의 보존·지속성·안정성을 제고한다는 정책 목표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세계적 명성의 전미경제연구소(NBER)는 주민발의안 13호의 실제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법으로 인해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동일 주택 거주 기간은 다른 주에 비해 훨씬 길어졌다. 옛날 집에 계속 거주하면 세금을 적게 내는데 새집을 사서 이사하면 몇 배의 세금을 내야 하니 집주인들은 웬만하면 그냥 머문다. 투기 수요가 저절로 억제된다.

전미경제연구소는 인정의 정의 실현으로 얻는 사회적 이득이 형평의 정의가 훼손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보다 크다고 봤다. 정책이란 이런 것이다. 상충하는 가치 중 최선의 조합을 찾고, 말만 앞서는 정의보다 실제의 효과를 보고, 사회 통합과 개인 삶의 무게를 고루 존중해야 한다.

거대 여당은 부동산 관련 입법을 속전 속결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절차적 껍데기만 지켰을 뿐 실질적 내용은 모두 팽개쳤다. 대통령을 비롯해 경제부총리, 국토부 장관, 여타 국무위원들, 여당의 당 대표등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거칠게 표출되는 정의의 외침만 있을 뿐, 무엇이 민주주의 국가의 정책이고 무엇이 실사구시의 결과를 낳는지에 대한 치열한 성찰은 찾을 수 없다.

형평의 정의 vs 인정의 정의

국민의 전체 자산 중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미국이 30%, 한국이 80%다. 10억원 짜리 집에 사는 미국인은 부동산을 포함해 33억원을 가진 자산가지만, 같은 가격의 집에 사는 한국인은 다 합쳐봐야 12억5000만 원을 가졌다는 뜻이다. 거칠고 투박한 정책으로 성실한 납세자의 삶을 훼손하는 피해의 정도가 미국에 비해 몇 배나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형평의 정의와 인정의 정의를 함께 고민하는 정책의 철학에서 실패했다.

정치적으로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8월 14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부동산 정책에 대한 긍정 평가는 18%, 부정 평가는 65%다. 젊을수록, 서민일수록, 임차인일수록 전·월세가 오르고 집 사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불안감은 더 커졌다.

미래통합당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차기 대선에서 부동산세 인하 공약 하나 만으로도 커다란 파급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시장에 대한 과격한 개입은 납세자의 광범위한 저항을 가져오고, 결과적으로 시장 만능주의를 다시 불러들인다. 미국 민주당의 20년 천하를 가져온 뉴딜 연합이 깨지고 80년대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열릴 때 미국의 분위기도 딱 그랬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