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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팡 “금하는 것 소통만 못하다”…기숙사에 연인실 만들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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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0〉

인민복 입고 제3야전군 사병들과 함께 춤추는 우이팡. 1949년 5월 초, 진링여자대학 체육관. [사진 김명호]

인민복 입고 제3야전군 사병들과 함께 춤추는 우이팡. 1949년 5월 초, 진링여자대학 체육관. [사진 김명호]

진링여자대학의 시설과 교육환경은 당대 최고였다. 교장 우이팡(吳貽芳·오이방)은 하나를 더했다. 당시 국립 진링대학에는 잘생긴 남학생들이 많았다. 진링여대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명승지 쉬안우후(玄武湖) 인근은 해만 지면 진링여대와 진링대학 학생들의 데이트 장소였다.

‘불온 학생’ 체포하러온 경찰에 #우이팡 “나를 잡아가라” 저지 #국민당 교육부장 자리 두 번 거절 #대만 함께 가자는 전화 받지도 않아 #공산당 산하 장수성 교육청장 맡아 #우이팡 만난 마오 “신중국 영광”

진링여대는 밤 9시만 되면 기숙사문을 닫았다. 우이팡은 새벽에 학교를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루는 기숙사 창문 앞에 의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졸업생이 구술을 남겼다. “교장은 늦게 돌아온 학생이 의자에 올라가 창문을 넘어 숙소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교내에 연인실(戀人室)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금하는 것이 소통만 못하다는 말에 다들 동의했다. 기숙사 1층 휴게실에 탁자와 의자를 갖춘 작은 방들이 들어섰다. 밤 9시 전까지 학생들은 그 안에서 연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요구 사항도 있었다. “먹고 난 사탕봉지와 과일 껍질은 남학생이 들고 나가라.” 로칼(Local)이라는 용어가 교내에 유행했다. 러브콜(Love Call)의 약자였다. 누구의 연인이 나타나면 학생들은 친구 이름 부르며 “네 로칼이 왔다”고 수다를 떨었다.

실연당한 여학생이 음독을 기도했다. 우이팡은 학생을 꾸짖었다. "나도 한때 세상을 등지려 한 적이 있었다. 자살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안 지려는, 비열한 사람의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자 뜻을 접었다.” 일찍 발견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여학생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화학을 전공한 이 여학생은 훗날 원자탄 개발에 한몫했다.

“사탕봉지는 남학생들이 들고 나가라”

진링여자대학의 연인실. 남학생들이 여자친구 만나러 왔을 때 한쪽 구석에서 교무주임이 어슬렁거리거나 신문 보는척하며 연인실을 감시했다. [사진 김명호]

진링여자대학의 연인실. 남학생들이 여자친구 만나러 왔을 때 한쪽 구석에서 교무주임이 어슬렁거리거나 신문 보는척하며 연인실을 감시했다. [사진 김명호]

1937년 7월 초,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저명 교수들을 뤼산(廬山)으로 초청했다.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했다. 전시에도 교육은 평소와 같아야 한다.” 황급히 난징(南京)으로 돌아온 우이팡은 교무위원회를 열었다. 대학을 쓰촨(四川)성 청두(成都)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12월 3일, 일본군이 수도 난징을 공격하기 직전, 우이팡은 학생들과 영국 상선에 올랐다. 40여일간 영국 군함에 바짝 붙어가며 일본의 공습을 피했다. 청두에 도착한 우이팡은 현지 대학과 연합했다.

전쟁 기간, 우이팡은 미국에 있는 진링여대 졸업생과 미시간대학 동창들이 보내준 성금을 요긴하게 썼다. 전시아동보육원을 차리고, 일본 점령지역에서 온 여학생들에게 교육 기회를 줬다. 부상병 돌보러 전쟁터로 나가는 학생들에게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수지원단 이끌고 미국도 방문했다. 전역 순방하며 미국의 참전을 호소했다. 루스벨트가 지혜의 여신이라며 극찬할만했다.

전쟁 중에도 학내 규정은 엄격했다. 재학 도중 결혼하면 자동 퇴학이었다. 군인과 몰래 결혼한 학생이 있었다. 우이팡은 평소 아끼던 생활용품 들고 학생의 집을 찾아갔다. 결혼을 축하하며 더는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타일렀다. 몇 년 후 학생의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 듣고는 재입학을 권했다. "자녀는 부속 보육원에서 책임지고 키우겠다. 학업에만 열중해라.”

전쟁이 끝나자 국·공 내전이 벌어졌다. 국민당은 교육기관 장악에 열을 올렸다. 교내에 정보원을 침투시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1948년 가을 야밤에 경찰들이 난징의 대학 기숙사들을 동시에 덮쳤다. 진링여자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이팡은 기숙사 정문에 서서 경찰들을 제지했다. 눈 감고 고개 숙인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 학교의 대표다. 여기는 여자들만 있는 교육기관이다. 나는 당신들을 부른 적이 없다.” 인솔자가 명단을 내밀었다. "이 학생들만 데려가면 된다.” 우이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 된다. 빈손으로 가기 싫으면 나를 잡아가라.” 인솔자는 우이팡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한숨 내쉬며 철수했다. 투덜대는 부하들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차라리 길길이 뛰어댔으면 제압하기 쉬웠다. 차분한 음성과 몸가짐이 어찌나 품위가 있던지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오래 있다간 무슨 망신 당했을지 모른다. 위에서 뭐라고 하건, 오늘처럼 해야 나중에 좋은 소리 듣는다.”

이튿날 우이팡은 교육부장을 방문했다. "여자대학의 명예를 위해 군경의 난입을 막아주기 바란다. 블랙리스트에 있는 우리대학 학생들의 명단을 주면 내가 교육하겠다.” 대학마다 비밀조직이 있었지만, 진링여자대학 학생들은 국민당이 대륙에서 철수하는 날까지 한 명도 잡혀가지 않았다.

23년간 9.9㎡짜리 교장실에서 집무

난징의 유서깊은 유원지 쉬안우후 주변은 젊은 남녀들의 좋은 휴식처였다. 1930년대의 쉬안우후 정경. [사진 김명호]

난징의 유서깊은 유원지 쉬안우후 주변은 젊은 남녀들의 좋은 휴식처였다. 1930년대의 쉬안우후 정경. [사진 김명호]

우이팡은 국민당의 부패와 무능에 염증을 느꼈다. 장제스 하야 후 교육부장 맡아 달라는 대리총통 리쭝런(李宗仁·이종인)의 제의를 거절했다. 함께 대만으로 가자는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1949년 4월 말, 난징에 입성한 중국인민해방군 제3야전군 대표가 우이팡에게 정치협상회의 참여를 청했다.

정치협상회의에서 전족한 여인을 발견한 마오쩌둥이 이름을 물었다. 장수(江蘇)성 교육청장 우이팡이라고 하자 함박웃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존함(大名) 들은 지 오랩니다. 교육부장을 두 번 마다한 분이 성 교육청장 직을 맡다니 신중국의 영광입니다.”

우이팡은 23년간 9.9㎡(3평)짜리 교장실에서 집무했다. 싸구려 차만 마시고, 먹는 얘기는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의복도 행사 때 입을 두벌 외에는 평범한 의상 몇 벌이 다였다. 매달 받는 봉급도 학생과 친구들을 위해서 썼다. 패물은 졸업생들이 선물한 진주목걸이 외에는 없었다. 그래도 어딜 가나 품위가 좌중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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