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죽을 때까지 외칠랍니다, 내 선친 목숨값 내놓으라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광복 75주년 한수산의 기록-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 ② 

※편집자의 말
“저쪽이 조선이다.”
한수산 작가의 소설 『군함도』는 일본에 끌려간 징용공의 이 말로 시작한다. 중앙일보 광복 75주년 기획 '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은 징용공이 그토록 그리워 했던 ‘저쪽 조선’에 남았던 아들딸들의 이야기다.
그의 소설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군함도 탈출을 시도한 조선인들은 징용공이기 전에 아버지였다. 27년간의 조사와 고증 끝에 군함도로 끌려간 아버지들의 사투를 소설로 완성한 한수산 작가가 이제 남겨졌던 강제 동원 피해자 아들딸들의 생존기를 중앙일보에 기록한다.

파푸아뉴기니 끌려갔다 귀환 #경찰 투신한 아버지 6·25 때 전사 #내 나이 열일곱에 모친과도 사별 #졸지에 가장 돼 두 동생과 모진 삶 #정부,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때 #생환자 유가족은 철저히 배제 #한·일 청구권자금 무상 3억 달러 #징용 피해자와 유족에게 줘야

징용 생환자 유가족 김인성씨

 김인성씨는 코로나19로 도심 집회가 금지되기 전까지 청와대 앞에서 아흔 아홉번의 화요집회를 열었다. 한ㆍ일 협정이 체결된 날이 화요일이라 화요집회로 정했다. 아버지를 끌고간 일본도, 한ㆍ일 협정 때 받은 일본 돈을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주지 않은 정부도, 그 돈을 받아 번창한 기업들도 모두 그가 맞서온 투쟁의 대상이다. 광복 75주년 전날인 14일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1인시위에 나선 김인성씨. 임현동 기자

김인성씨는 코로나19로 도심 집회가 금지되기 전까지 청와대 앞에서 아흔 아홉번의 화요집회를 열었다. 한ㆍ일 협정이 체결된 날이 화요일이라 화요집회로 정했다. 아버지를 끌고간 일본도, 한ㆍ일 협정 때 받은 일본 돈을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주지 않은 정부도, 그 돈을 받아 번창한 기업들도 모두 그가 맞서온 투쟁의 대상이다. 광복 75주년 전날인 14일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1인시위에 나선 김인성씨. 임현동 기자

2018년 4월 10일 화요일. 그가 “목숨을 걸었다”고 표현하는 청와대 앞 항의집회가 시작됐다. 첫 집회를 화요일로 택한 것은 한ㆍ일 협정이 체결된 그날이 화요일이기 때문이었다. 시위용으로 개조한 트럭에 오른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 국민은 통곡한다! 한ㆍ일 협정 청구권 자금 무상 3억 불은 우리들 아버지의 목숨 값이다! 정부는 한 맺힌 피해 국민과 유족들에게 3억 불을 현재 가치로 환산, 즉시 반환하라!”

하루도 빠짐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눈이 내려도 매주 화요일 오전 11시 청와대 앞 집회를 99회까지 이어온 그는 강제 동원 피해자 고(故) 김판개의 아들 김인성(80)씨다.

“나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위가 시작되면 몇 시간이고 말이 나와요. 피해 영령들께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옵니다. 단 한 번도 날씨 때문에 시위를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합니다. 보아라, 영령들이 도와주고 계시지 않느냐.”

이제 한 주일만 지나면 100회를 앞둔 시점이었다. 코로나19가 휩쓸며 도심 집회 금지가 내려졌다. 집회는 무기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의해 군속으로 파푸아뉴기니까지 끌려갔던 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김판개씨. 해방되고도 2년이나 지난 1947년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고, 경찰에 투신했다. 생전 경찰 정복을 입은 모습. 임현동 기자

일제에 의해 군속으로 파푸아뉴기니까지 끌려갔던 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김판개씨. 해방되고도 2년이나 지난 1947년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고, 경찰에 투신했다. 생전 경찰 정복을 입은 모습. 임현동 기자

“선친은 1942년 6월에 끌려갑니다. 해방이 돼도 소식이 없자 다들 돌아가신 줄 알았답니다. 파푸아뉴기니까지 군속으로 끌려갔던 아버지는 47년에야 돌아오십니다. 밀림 속에서 어떻게든 연명하다 일본으로 들어갔고, 화물선을 타고 한국으로 밀항을 하는데, 농산물을 싣고 오던 배가 풍랑에 좌초되자 사흘을 바다에 떠다니는 애호박을 먹으며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돌아온 아버지는 1949년 경찰에 투신, 순천경찰서에서 첫 복무를 시작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며 지리산 백아산 전투에서 전사, 짧은 경찰생활을 마감한다. 1951년 9월 21일. 그가 열한 살 때였다.

아버지가 안 계신 것도 서러운데 여기저기서 ‘호로자식’ 소리를 들으며 커야 했다. 그것만은 참을 수 없어 성격이 난폭해지며 거친 청소년기를 보내던 열일곱 살, 어머니마저 돌아가신다. 할아버지마저 장남을 잃은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나자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그는 두 동생을 돌봐야 할 스물한 살 청년이 돼 있었다.

“온갖 풍파를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천성이 덤덤한 편이었는데 아버지는 참 자상했습니다. 돌아오신 후 짧은 몇 년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는데….”

‘돌아온 아버지는...’ 하고 말을 이어가는 순간 고개를 숙였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번득이고 있었다. 파란의 역사를 겪어야 했던 세대의 가슴에 묻혀 있는 비통의 깊이를 누가 알겠는가.

“나는 80년대 초반부터 투쟁에 나섭니다. 아버지는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쳤는데 국가가 유가족에게 해 준 게 뭐냐. 데모를 하면 경찰이 발버둥치는 우리를 강제로 버스에 태우기는 하는데, 경찰서로 가는 게 아닙니다. 멀리 교외로 싣고 가서 버려요. 그때 김포공항 쪽이 한창 개발 중이었는데 거기 공터에 풀어놓고는 도망치듯 가 버려요. 그때 경찰은 그랬습니다.”

버스정류장도 보이지 않는 난개발의 벌판을 터덜터덜 걸어 나오면서도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 피 끓는 젊은 나이로 산화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존감 속에 살았다.

80년대 후반에야 법이 만들어지고 유자녀 수당이 지급된다. 그때 김인성씨는 유가족 측 협상 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강제 동원 보상운동의 최일선에 나섰다. 그는 한일회담에 대한 문건들을 공부하며 투쟁의 갑옷을 만들었다. 그의 창이 겨눈 상대는 포스코(포항제철)였다. 포스코는 한ㆍ일 청구권 자금을 사용한 대표 기업이었다. “피의 대가로 짓는 공장이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는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박태준 회장의 비장한 발언도 알게 됐다.

한일협정 관련 문서는 2005년 일반에 공개됐다. 김인성씨는 한 ㆍ일 협정 관련 문서들을 공부하며 강제동원 피해자 및 유족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기 위한 싸움을 준비했다. [중앙 포토]

한일협정 관련 문서는 2005년 일반에 공개됐다. 김인성씨는 한 ㆍ일 협정 관련 문서들을 공부하며 강제동원 피해자 및 유족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기 위한 싸움을 준비했다. [중앙 포토]

2006년 4월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 100인이 포스코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다. 김인성씨는 원고 대표로 참여했으나 패소했다. 다만 조정에 갈음하는 판시가 있었다. ‘피고인 포스코는 강제 동원 피해자 및 그 유족에 대해 기업의 사회· 윤리적 책임이 있음’을 적시했던 것이다.

포스코가 책임을 이행하지 않자 김인성씨는 포스코 주주총회에 진입할 계획을 세운다. 2010년 2월 25일, 주주가 아니어서 참석 자체가 불가능한 주총장 입구를 그는 정장 노신사의 근엄한 일갈(一喝)로 뚫고 들어갔다. 발언 시간을 얻은 그는 설득력 있는 발언으로 사회적 책임을 촉구했고 “정부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면 흔쾌히 돕겠다”는 포스코의 공식 입장을 이끌어낸다.

이 무렵 정부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원’하기로 한다. 해외에서 사망한 자에게는 2000만원, 생환자 중 살아 있는 자에게는 연 80만원의 의료비가 지급된다.

그러나 생환자 중 사망한 자는 대상에서 제외됐다. 살아 돌아온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난 김인성씨는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했다.

청와대 앞 시위를 시작했을 때 그에게 허락된 장소는 멀리 떨어진 청운동사무소 앞이었다.

“경찰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내가 33세에 전사한 당신들의 대선배 경찰의 아들이다. 경찰청장이 수여한 유족 기장 1호를 가지고 있는 호국영령의 자손이다. 청와대까지 내 목소리가 들려야 하니 장소를 옮겨 달라.”

경찰의 배려로 3회 시위부터 청와대 사랑채 옆으로 시위 장소를 옮길 수 있었다. 지난해였다. 전광훈 목사 시위대가 바로 그 장소를 점거, 철야농성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경찰청장이 수여한 경찰유족기장. 김인성씨가 항상 품 안에 넣고 다니는 보물이다. 그의 아버지인 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김판개씨는 6.25 전쟁 때 전투에 참여했다 순직했다. 임현동 기자

경찰청장이 수여한 경찰유족기장. 김인성씨가 항상 품 안에 넣고 다니는 보물이다. 그의 아버지인 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김판개씨는 6.25 전쟁 때 전투에 참여했다 순직했다. 임현동 기자

“나랑 한방 붙었지요. 내 시위를 방해하는 목사의 마이크를 뺏어 내던지니까 그쪽 시위대가 와르르 달려들어요. 늙은 내가 방법이 없지요. 손등이 까져 피가 나고 몸에도 상처가 나고. 결국 경찰이 중재에 나서더군요. 이분이 하는 시간만은 당신들이 중단하라고.”

그는 청와대를 향해 “이 날강도들아, 도둑놈들아.”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니들이 우리 선친의 영혼을 팔아먹지 않았느냐."

“욕 자알 듣고 있습니다.” 청와대 직원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사이가 됐다. “한국은 도둑놈이고 일본은 장물아비다!” 이 발언을 좀 순화시킬 수는 없는가 물으려는데 그는 오히려 시위장비를 격상시켰다고 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눈물이 맺히는 오늘, 전쟁과 분단에 아버지를 잃은 비극도 시간과 함께 흘러 75년. 자신은 늙고 4남1녀의 자식들이 자랐다. 꿈도 기대도 함께 자라며 15명의 손주가 태어났다. 둘째 아들의 딸이 아들을 낳아 증손자까지 보았다. 올해는 늦게 결혼한 장남의 외동딸이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하며 할아버지를 한껏 기쁘게 했다.

지금은 딸과 함께 아파트에서 지내며 노부부는 친구처럼 산다고 했다. 엄마랑 사이좋게 놀러나 다니시지 그 나이에 무슨 데모냐며 용돈을 끊어 버린 아들도 있다고 했다.

열한 살 때 전쟁에 아버지를 빼앗겼고, 열 일곱살 때 어머니마저 잃었다. 두 동생을 책임지며 모진 길을 걸어왔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자랑스러움으로 이겨냈다. 지금은 4남1녀에 손자ㆍ손녀만 15명. 다복한 가정을 이뤘다. 가족들과 함께 셀카를 찍고 있는 김인성씨(맨 왼쪽). 옆으로는 부인과 딸, 손자다. 임현동 기자

열한 살 때 전쟁에 아버지를 빼앗겼고, 열 일곱살 때 어머니마저 잃었다. 두 동생을 책임지며 모진 길을 걸어왔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자랑스러움으로 이겨냈다. 지금은 4남1녀에 손자ㆍ손녀만 15명. 다복한 가정을 이뤘다. 가족들과 함께 셀카를 찍고 있는 김인성씨(맨 왼쪽). 옆으로는 부인과 딸, 손자다. 임현동 기자

“기가 막히는 건 청구권 자금 무상 3억 불이 일제 피해자의 몫이라고 선동하던 모 변호사가 2018년 10월 30일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이후 그 돈은 경제협력자금이지 피해보상금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 교수는 한국 정부도, 지원을 받은 기업도 보상할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일제 피해자들을 분열시키는 프락치라고 봅니다. 보상운동의 걸림돌입니다.”

강제 동원 피해자의 유족으로, 남북 분단의 비극 속에 전사한 곡성경찰서 경위의 아들로, 열일곱 살에 어머니마저 잃은 장남으로 두 동생을 보살피며 3중고의 삶을 견디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지도, 주저앉지도 않았다. 밟히면 다시 일어섰고, 때리면 더 소리 내어 울리는 종소리가 돼 살았다. 그 세월이 이제는 소실점을 이루며 등 뒤 저편으로 뻗어 있다. 줄기찬 저항 속에 살아낸 날들이 여든 살 그의 어깨에서 견장처럼 빛나고 있다.

 1인 시위 중인 김인성씨의 어깨 너머로 청와대가 보인다. 아흔 아홉 번의 화요집회를 하다 보니 청와대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경비경호를 서는 경찰과도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임현동 기자

1인 시위 중인 김인성씨의 어깨 너머로 청와대가 보인다. 아흔 아홉 번의 화요집회를 하다 보니 청와대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경비경호를 서는 경찰과도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임현동 기자

“나는 죽는 그날까지 이 일을 할 각오입니다. 끝내 국가의 보상을 받아내고야 말 겁니다.”

그가 남은 생을 어떻게 경영할지는 그의 열정과 끈기, 그리고 현명함의 몫이리라. 나와 헤어져 돌아가는 그의 정정한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강제 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들이 75년을 갈망해 온 실타래의 한 가닥이라도 풀어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한수산 작가

한수산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