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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의 시선

얼마나 더 국민이 외면해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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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집단사고(groupthink)’는 그리 좋은 뜻을 지닌 단어가 아니다. 무리 중의 실세가 “이거다” 외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똘똘 뭉쳐 한목소리를 내는 게 집단사고다. 부작용이고 뭐고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툭 하면 사고를 친다. 당연히 집단사고는 ‘집단지성’과 의미가 전혀 다르다. 둘 사이의 구분은 간단하다. 여럿이 개인보다 훌륭한 결과를 내면 집단지성이고, 되레 혼자만 못하면 집단사고다.

반대 의견에는 침묵 강요하고 #인사 배타적인 청와대·여당은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져 있다

집단사고란 개념은 1970년대 초 미국의 심리학자인 어빙 재니스 예일대 교수가 제시했다. 재니스 교수는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쿠바 피그스만 침공(1961년)을 들었다.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1400명이 쳐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거의 전원이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한 사건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F. 케네디였다. 침공 결정은 당대의 엘리트들이 모여 했다. 그런데도 실패했고, 피그스만 침공은 미국의 외교 역사상 가장 큰 수치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뭐가 잘못됐던 것일까. 속으로 침공에 반대한 이는 있었으나 대놓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 대통령 특보였던 아서 슐레진저는 회고록에서 “반대 의견을 갖고도 침묵했다”고 자책했다. 사실 그의 침묵은 강요당한 것이었다. 슐레진저의 속내를 알아챈 건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였다. 그는 슐레진저를 사석에서 만나 말했다. “대통령이 마음을 굳혔다. 당신도 마음을 정리하라. 지금은 한마음으로 대통령을 도와야 할 때다.”(『반대의 놀라운 힘』, 샬런 네메스)

재니스 교수 이후 많은 심리학자가 집단사고를 연구했다. 기업의 의사 결정과 밀접한 분야라 경영학자들도 가세했다. 그러면서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집단의 특성을 추려냈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이 강하고, 배타적이며, 리더 또는 리더 그룹이 권위적이고, 다양한 목소리나 반대 의견을 억누른다는 것 등이다.

이런 특성, 어딘지 익숙하다. 도덕적 우월 의식은 문재인 정부의 도그마다. 협치는 온데간데없고 인사는 끝없이 코드로 채운다(배타성). ‘청와대 정부’가 북 치고 장구 치는 사이, 전문 관료는 힘을 잃어 간다(권위적인 리더 그룹). 집단 내 반대 의견은 숫제 원천봉쇄 수준이다.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당론과 달리 공수처 법안에 기권표를 던졌다가 징계를 받았다. “반대하지 말라. 설혹 반대이더라도 침묵하라”는 강압이다.

집단사고의 결말은 처참한 실패다. 국민을 절망케 한 부동산 정책,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정의기억연대를 놓고 보여 준 끝 모를 제 편 감싸기, ‘개혁’으로 포장한 검찰 장악 등은 모두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진 결과물이다. 국민은 등을 돌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보다 ‘잘 못 한다’는 평가가 많아졌다. 미래통합당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지지율이 민주당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정권 교체 의견이 우세하다’는 여론 조사도 나왔다.

피그스만 침공 이듬해, 미국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옛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했다. 피그스만에서 쓴맛을 봤던 케네디 대통령과 참모진이 대응책을 세워야 했다. 이들은 실패에서 배웠다. 이번엔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참모진은 난상토론을 했다. 케네디의 의중을 살펴 의견을 내는 일이 사라졌다. 어떤 때는 아예 케네디를 빼고 토론했다. 쿠바 재침공을 포함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 그렇게 결론지은 해상봉쇄 조치로 케네디는 미국 국민의 단단한 지지를 받게 됐다. 우리 청와대와 여당에도 이렇게 유연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글쎄…. 스무 번 넘게 부동산 정책에 실패한 장관을 끝끝내 안고 가는 게 이 정부다.

액셀러레이터만 달린 차는 운전할 수 없다. 브레이크가 필수다. 집단에서 브레이크는 당당한 반대 의견과 대안, 그리고 경청하는 자세다. 그러나 집권 여당은 내부 반대 의견에 재갈을 물림으로써 브레이크를 스스로 부러뜨렸다. 그러고선 절대다수의 힘을 이용해 마냥 폭주한다. 민주주의는 이런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다. 견제 장치인 독립기구를 뒀다. 헌법재판소와 법원·감사원 등이다. 법리 해석과 감사 등을 통해 정권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외부 브레이크다.

그러나 요즘은 이마저도 이상하게 돌아간다. 사법부는 브레이크 밟기는커녕 액셀을 한층 더 꾹 누르는 분위기다. “공정성·독립성을 지키겠다”는 감사원엔 여당이 “어딜 감히”라는 투로 십자포화를 날리고 있다. 집단사고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좀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여권엔 국민의 외면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