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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신 제이슨이라 불러라” 소통 명가 꿈꾸는 고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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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고희진 감독은 2003년 입단해 선수, 코치를 거쳐 감독까지 18년 동안 삼성화재에서만 지낸 ‘원 클럽 맨’이다. 김상선 기자

고희진 감독은 2003년 입단해 선수, 코치를 거쳐 감독까지 18년 동안 삼성화재에서만 지낸 ‘원 클럽 맨’이다. 김상선 기자

"맥스(김형진), 길게." "톰(박상하), 좋았어." "숀(이지석), 적극적으로!"

프로배구 80년대생 첫 감독 #18년간 삼성 선수·코치 ‘원 클럽 맨’ #선수도 영어 이름 부르며 공감 노력 #“팀 재정비해 2~3년내 정상 오를것”

프로배구 삼성화재와 우리카드의 연습경기가 열린 14일 경기도 용인 삼성 트레이닝센터. 코트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만 들으면 외국인 선수가 10명은 될 것 같았다. 삼성화재 선수들은 서로를 영어 이름으로 부른다. 고희진(40) 삼성화재 감독 아이디어다. 프로배구 첫 1980년대생 감독다운 재기발랄함이 느껴졌다.

고 감독에게 이유를 묻자, 2012~15년 삼성화재에서 뛴 레오(브라질) 얘기를 꺼냈다. 고 감독은 "레오가 한국 이름을 불편해했다. 부르기 쉽게 영어 이름을 정했다. '희진이 형'보다 '제이슨'이 짧고 편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서로 편한 수평적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선수들한테도 '감독님' 대신 '제이슨'이라고 부르라 했다. 어려워하는 선수도 있지만 젊은 친구들이라 빠르게 적응했다"고 덧붙였다.

고희진은 2003년 삼성화재에 입단했다. 화려하진 않아도, 꾸준하게 14시즌을 뛰었다. 삼성화재는 프로 출범 후 8차례 우승했는데, 챔피언 결정전에 모두 출전한 건 그뿐이다. 2016년 은퇴하고 코치가 됐다. 고 감독 은퇴 후 삼성화재는 한 번도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지 못했다. '배구 명가'라는 타이틀도 무색해졌다.

2019~20시즌이 코로나19로 조기 종료된 뒤, 구단은 새 감독 후보로 고희진 코치와 외부 인사를 저울질했다. 18년간 선수와 코치로 삼성화재에 몸담았던 '원 클럽 맨' 고희진은 '팀을 떠날 수도 있겠다'고 처음 생각했다. 고 감독은 "코치도 감독만큼은 아니어도 성적에 대해 책임 있다. (시즌 뒤) 두 가지로 생각했다. '내가 감독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감독이 된다면 좋다. 하지만 아니라면 새 감독을 위해 팀을 나가야 한다. 이렇게 마음먹었다"고 전했다.

삼성화재는 결국 제4대 감독으로 고희진을 선택했다. 삼성화재 전성기 팀을 이끈 신치용 진천선수촌장은 과거 "고희진은 삼성화재 배구를 잘 알고 성실하다. 훌륭한 지도자감"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고 감독은 "믿어준 분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삼성화재는 전부터 엄격한 규율과 분위기, 지독한 훈련으로 유명하다. 매일 아침 7시 체중을 쟀고, 밤에는 휴대폰을 반납했다. 훈련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과거 삼성화재에서 세터로 뛴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은 우스갯소리로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경기하는 게 몸이 편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 감독은 팀 분위기 만큼은 밝게 바꿨다. '영어 이름'도 한 예다. 창모의 '메테오'처럼 젊은 세대에 인기 있는 랩을 듣는 등 선수들과 대화를 편하게 이끌려고 노력한다. 지난 시즌 뒤 우리카드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한 레프트 황경민은 "삼성화재 스타일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감독님이 젊어서 그런지 생각만큼 소통이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고 감독은 "시대가 바뀌었다. 요즘 선수들은 '내 기준'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결정을 한다. 이를테면 자유계약선수(FA)가 됐을 때, (돈뿐만 아니라)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 계약을 결정한다. 선수들이 오고 싶어하는 삼성화재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어 "서로의 생각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공감하고 발전한다"고 덧붙였다. 체육관 사무실 한쪽엔 '공감'이라고 써 붙였다.

최근엔 주장을 맡은 박상하에게 등번호 10번을 권유하기도 했다. 고 감독이 현역 시절 쓰던 번호다. 고희진 감독은 "상하가 팀을 잘 이끌어주고 있다. 현역 때 내가 센터 주장 10번이어서 상하에게 권했는데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했다. 17번에서 10번으로 바꿔단 박상하는 연습경기 내내 소리를 높여 동료들을 독려했다. 과거 고희진과 박쳘우가 했던 역할을 그가 하고 있었다.

삼성화재는 비시즌 동안 남자부 구단 중 제일 많은 연습경기를 했다. 고 감독은 "많이 지고 있다. 그래도 컵대회까지는 경기를 많이 하려고 한다. 새로온 선수도 있고, 새로온 코칭스태프(김영래, 이강주)도 있다. 무엇을 잘 하고, 어떻게 플레이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프로배구는 22일 충북 제천에서 코보(KOVO) 컵대회를 시작한다. 정규시즌 개막도 두 달이 남지 않았다. 삼성화재는 하위권 전력으로 분류된다. 주포 박철우(한국전력)가 떠났고, 트레이드 영입한 세터 노재욱은 사회복무 요원으로 근무 중이다. 고 감독은 "전력상 (좋은 성적이) 힘든 건 인정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다. 빨리 팀을 재정비해 2, 3년째에는 정상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다.

용인=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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