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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레이 아티스트 늦깎이 데뷔…작품은 교과서에 실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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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호 28면

[J닥터 열전] ‘별난 의사’의 슬기로운 취미생활

정태섭 교수는 ’엑스레이 아트는 차가운 진료 현장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이라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정태섭 교수는 ’엑스레이 아트는 차가운 진료 현장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이라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곤 한다. 하지만 막상 새로운 길을 찾겠다고 마음먹으면 ‘너무 늦은 건 아닐까’란 두려움이 밀려온다.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 영상의학과 정태섭(66) 교수는 ‘늦은 시작’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의사다. 인생 황혼기인 53세에 뒤늦게 엑스레이(X선) 아티스트로 데뷔했다. 엑스레이로 촬영한 흑백 사진에 컴퓨터그래픽 작업으로 색·명도·채도를 조절하고 편집해 작가의 감성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국내에선 정 교수가 시초다.

정태섭 국제성모병원 영상의학과 교수 #화폐 수집, 가방 디자인 등 20가지 #도전·시행착오 즐기며 새 길 개척 #“즐길 거리 많으니 앞날 안 두려워 #하루 30%는 자신 위해 투자하라”

그의 남다른 이력은 이뿐이 아니다. 세계 화폐와 현미경 수집, 별자리 관측, 넥타이와 가방 디자인, 음향기기 만들기 등 그의 취미는 20가지 정도 된다. 취미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넘치는 수준이다. 엑스레이 아트 작품은 초·중·고 미술·과학 교과서에 실렸고 그가 수집한 세계 화폐 물량은 고등학생 때 이미 국내 서열 100위 안에 들 정도였다. 전 세계를 다니며 수집한 초기 엑스레이·현미경 등 역사 유물 140여 점은 모교인 연세대에 기증했다. 이쯤 되면 ‘별나고 엉뚱한 의사’라고 불릴 만하다.

‘DIY 생활화’가 취미생활의 원동력

이렇게 많은 취미를 즐기게 된 계기는 뭔가.
“어릴 때부터 만들고 기계 다루는 걸 좋아했다.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공업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퇴직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형들도 모두 공대 출신이다. 집안이 DIY(Do It Yourself·스스로 만들기)를 권장하는 분위기였다. 전축·앰프를 만들어 판 돈으로 화폐를 수집하고 당시 돈 주고 사기엔 사치였던 망원경을 직접 만들어 보는 식이었다. DIY를 생활화한 게 취미생활의 원천이 됐다.”
엑스레이 아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병원도 경쟁 사회다. 교수가 됐지만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낮엔 영상을 찍거나 판독하고 밤엔 논문을 썼다. 온종일 싸늘한 사진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미어터지고 갑갑했다. 환자의 영상 사진을 보다 보면 신체 구조나 병변의 형태가 간혹 꽃·하트 모양인 경우가 있다. 그런 것을 찾아내 색을 입히고 아름답게 만드니 온기가 느껴졌다. 이를 계기로 엑스레이 아트를 시작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늘 소풍 가는 기분이었다.”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았나.
“병원 동료나 선후배 시선을 신경 썼다면 하지 못했을 일이다. 할 일 다 하면서 틈틈이 내 시간을 만들어 즐겼다. 관심 가는 일이 생기면 직접 온몸으로 부딪히는 편이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해보니 즐길 거리가 엉성한 수준에서 끝나면 안 되더라. 맹렬하게 파고들어 어느 경지에 올라서면 다들 인정해주고 즐거워한다. 그걸 보는 나도 재미와 행복감을 느낀다.”
평생 즐길 취미 갖기가 쉽지 않다.
“취미를 찾으려면 스스로 길을 개척하려는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시도를 안 하려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건 곧 틈새시장 가능성이 열려 있단 뜻이다. 대다수가 취미는 대중적이어야 하고 한두 가지만 즐겨야 하며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전부 오해다. 목표에 급급해 하지 말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취미를 개발해 즐기면 된다.”

평균 수명이 늘면서 인생 이모작은 필수가 됐고, 언택트 문화의 도래로 비대면 소통 콘텐트가 주목받는 시대다. 그러나 한국인 대다수는 은퇴 후 삶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데다 혼자 시간 보내는 것을 힘들어한다. 관심사를 찾지 못해 일 외에는 여가 하나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정 교수의 취미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이상 관심을 두고 해온 일이다. 시간이 많아서, 주머니가 여유 있어서 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즐길 거리가 계속 늘어나니 앞으로 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변할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은퇴를 앞둔 50~60대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부터라도 하루 중 30%는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써보길 추천한다. 이를 자기 성찰, 건강 관리,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면 좋다. 특히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젊은 층과 교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려면 나이 들수록 감성을 충만히 해야 한다.”
감성은 왜 중요한가.
“겪어보니 삶은 이성·지성 위주의 디지털 문화와 감성 위주의 아날로그 문화를 적절히 융합시켜야 발전할 수 있다. 디지털 문화는 젊은 시기에 집중해야 한다면 장년층은 아날로그 문화를 염두에 둬야 한다. 감성을 통해 젊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줘야 한다.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디지털 문화에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어른이 돼야 한다. 감성을 충전하려면 둔해진 오감(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이 들수록 오감 자극하는 연습 해야

오감은 어떻게 키우나.
“오감에 친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어렵지 않다. 운동에 집중하거나 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간간이 집에 지인을 초대해 직접 요리한 음식을 대접하거나 취향에 맞는 커피·와인을 찾아 향과 맛을 즐기는 것도 좋은 시도다. 오감을 자극하는 연습과 훈련을 꾸준히 하면 감성이 충만해지고 삶의 원동력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인생에 변화가 찾아오길 꿈꾸는 사람이 많다. 정 교수는 이들과 정반대 삶을 산다. 남의 눈에 그럴듯해 보이는 일보다 내가 설레고 재밌어 하는 일에 공을 들인다. 사소함과 꾸준함의 가치를 알고 도전과 실패에 정면돌파하며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코로나로 바깥 활동이 뜸해진 요즘, 그는 책 원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열정의 원천을 물으니 “엉뚱한 짓도 조금씩 쌓이니 콘텐트가 되더라”며 웃는 걸 보니, 정 교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나이 드는 행복한 의사였다.

김선영 기자 kim.sun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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