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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소설과 교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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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청년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을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청년 괴테가 흠모했던 귀부인 샤를로테와의 좌절된 사랑 얘기다. 1776년 당시, 시민계급 출신 괴테가 아무리 문재가 출중해도 귀족계급과의 사랑은 신분 벽에 막혔다. 주인공 베르테르를 사망 선고할 수밖에 다른 출구가 없었다. 그것은 ‘슬픔’을 넘어 사회적 고뇌(Die Leiden)였다. 귀족의 담을 넘기가 그 때부터 시작됐다. 시민계급은 귀족의 취향과 생활양식을 흡수했고 교양을 연마했다. 전문지식과 시민윤리는 귀족과 대항할 시민계급의 무기였다. 대학과 교회, 예술가와 과학자가 앞장서 ‘교양 시민’을 만들어냈다.

교양시민을 길러낸 동력 교양소설 #문사철을 멀리 한 집권세력의 무지 #소설쓰시네, 시대에 가한 육두문자 #그건 외려 이 정권에 꼭 맞는 고백

중산층의 사회적 주도권을 양성한 주역이 교양 시민이고, 이들의 성장 과정에 숨긴 애환과 고뇌를 그린 소설이 ‘교양소설’이다. 괴테의 베르테르와 만(Mann)의 카스토르프(『마의 산』의 주인공)까지 150년간 교양소설의 주인공이 쏟아낸 사회적 휴머니즘의 언어는 교양시민의 내면이 됐다. 시민사회의 품격과 가치관을 형성한 원재료다.

한국에서 그에 필적할 교양소설이 있던가? 시민계급에 교양과 자양을 공급할 본격적 시민문학은 언제 꽃피웠는가? 전후 50년대 말 손창섭이 주도한 ‘소시민 문학’이 떠오르긴 한다. 시민의식을 당당하게 발설하지 못한 움츠린 군상이었다. 박경리의 『불신시대』, 강신재의 『표선생 수난기』가 소시민 군상에 합류했다. 1960년대 김승옥, 이청준, 최인훈이 시민의 표상을 닦았고, 뒤늦게 박완서가 소시민적 행복의 원류를 파헤쳤지만 여전히 교양 시민의 원숙한 실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의 상층부가 이미 축재와 권력쟁탈전에 돌입한 공간에서 교양 시민의 실체는 실종됐다. 1970년대 후반, ‘문사철(文史哲)의 시대’가 그렇게 끝났고, 이른바 ‘행동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문학은 더 이상 유용한 무기가 아니었다.

이 시대 민주주의 전사들이 왜 ‘교양 시민’이 아닌가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민주’라는 거역하기 힘든 가치를 장악한 국회, 청와대, 정부가 발한 언어들은 왜 거칠고 천박하며, 왜 모두 ‘천민청문회’가 되는가. ‘소설 쓰시네!’ 시민의 최상층인 법무장관의 이런 발화(發話)는 한 시대의 법정신에서 폭력의 성에를 제거하는 문학의 힘을 엿보지도 못한 무지의 소산이다. 81년 법학사, 82년 사시합격. 80년대 ‘운동의 시대’로 편입된 법무장관의 대학시절은 소설보다 선언서가 더 위력적이었다. 문학보다 혁명이론서를 끼고 다녔다. 신군부의 개정헌법을 외우며 분노를 삼켰을 것이다. 분노를 행동으로 옮길 때 문학이라는 여과장치, 언어의 승화작용을 거치지 않으면 공감 능력이 저하된다. 소설은 그저 망상, 허구, 불만을 쓸어 담는 휴지통이다. 발자크는 왜 『고리오영감』의 영민한 주인공 라스티냐크를 파리 사교계로 진출하게 했을까. 사법시험을 때려 치게 만든 플롯은 타락한 세상을 타락한 방법으로 투사하는 소설적 진실이다. 그리하여 ‘소설 쓰시네!’는 시대를 고뇌하는 익명의 존재들에게 가한 육두문자다.

문학은 추체험의 창구다. 독일어로 교양(Bildung)은 쌓는다, 짓는다는 뜻인데, 세상 이치를 터득하고 타인의 사정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공감능력이 길러진다. 80년대 학번, 지금 청와대와 권좌에 포진한 권력집단의 청년시절은 문사철을 버리고 ‘현장’을 선택한 기억으로 가득 찼다. 서민들의 생계가 이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이념강화, 혁명의 씨앗을 배양할 전략적 동지들이었다. 정권 실세의 정책 마인드에 ‘시민적 공감’은 실종되고 ‘전술적 연대’가 돋보이는 이유다. 일종의 독전대다. 독재를 밀어붙인 무용담, 진지전의 추억이 소주성이든, 최근의 주택정책이든 정당화 카드를 들이미는 그들만의 마음의 습관을 키워냈다.

자신의 선택은 항상 옳았다는 치명적 자만의 비용은 서민의 몫이다. 지난 3년간 엄청난 세금을 공중분해했다. 소주성에 투여된 50조원은 이미 증발했고, 임대차 3법은 전세대란과 집값 폭등을 낳고 있다. 전세대란에 짓눌린 임차인의 신음소리, 집값과 종부세 폭등에 볼멘 임대인의 분노는 이들이 배양한 투쟁적 DNA에 부딪혀 곧 잦아들 것이다. 송복 교수는 저서 『특혜와 책임』(2016)에서 이런 양태를 ‘리(理)실종, 기(氣)공화국’으로 짧게 묘사했다. 이 정권이 내세운 ‘정의와 공정’은 결국 투쟁적 기싸움을 북돋우는 수단적 논리다.

법무장관의 ‘소설’개념을 정확히 실행하는 주체는 이 정권이다. 집값 잡는다고 ‘수도이전’을 느닷없이 발설한 여당 원내대표는 세계시장의 바겐세일에 나올 600년 서울의 역사와 문화창달 가치를 보상할 복안은 있는가? 문사철을 홀대한 청춘이 집권세력이 되면 이런 제안이 자랑스럽다. 이해찬 당대표는 한술 더 떴다. ‘서울은 천박하다’. 중국과 일본의 등살에도 한민족 정체성을 지켜온 서울이 그리 천박한가? 몽(蒙), 청(淸), 왜(倭), 불(佛), 미(米), 중(中)의 군사와 전함을 막아낸 한강은 오늘도 흐른다. 집권세력이 쏟아낸 천박한 언어를 받아내면서 말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