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국민의 시대, 시민의 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일제 말기, 일본문학잡지 『문예』에 조선문학특집이 게재됐다. 일본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세 작가가 뽑혔다. 이효석, 유진오, 김사량. 식민지 문학을 내지(內地)의 보편성으로 융화한다는 의도였다. 이후 세 사람의 길이 갈라졌다. 이효석은 1942년 만주기행 직후 ‘황민’(皇民)이 맹위를 떨쳤던 시기에 토속을 품고 죽었다. 유진오는 제헌헌법을 기초해 남한 ‘국민’의 틀을 다졌다. 김사량은 해방 직후 태항산 조선의용대와 함께 귀국해 고향 평양에서 북한 ‘인민’대열에 합류했다. 일제의 황민이 소멸한 공간에서 국민과 인민이 맞붙은 게 6.25전쟁이었다. 식민지 유산이자 비극이었다.

국민은 나라 헌신, 시민은 윤리코드 #친일에도 국민 약속을 지킨 백선엽 #시민의 시대를 개척한 박원순은 #시민과의 약속을 스스로 파기해

고(故)백선엽은 황민에서 국민으로 이적했다. 그가 나온 만주군관학교는 대륙침략을 대동아공영으로 미화한 천황주의의 위장술임을 통감한 후였다. 게다가 그는 김일성과 소련을 꿰뚫어본 반공주의자였다. 6.25전쟁이 터졌다. 그는 수원에서 궤멸된 1사단을 수습해 대구 방어에 나섰다. 동쪽으로 영덕, 남쪽으로 마산까지 180㎞에 이른 낙동강 방어선에서 55일간 전투가 치러졌다. 두 전선이 가장 치열했다. 왜관 다부동전투, 영산 오봉리전투.

백선엽준장의 신생군대는 항일연군과 팔로군에 소속됐던 노련한 무정(武亭) 군단을 다부동에서 대적했다. 미25사단, 1기병사단과 방어에 나섰다. T-34전차와 경기관포로 무장한 3개 사단이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동안, 남서쪽 낙동강 돌출부 영산에서는 미24보병사단이 분투했다. 서울을 최초 돌파해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리권무소장의 4사단이 영산-밀양선에 화력을 집중했다. 포항은 이미 뚫렸다. 양안에 시체가 쌓였다. 8월 말, 북한군 13사단이 다부동 협곡으로 몰려들었다. 퇴각하는 500여명의 병사들을 독려해 백선엽준장이 권총을 빼들고 앞장 선 것이 이 때였다. 미 해병이 추가 투입된 영산전투에서 리권무는 1200구 시체를 남기고 결국 패주했다.

백선엽은 막 잉태한 국민국가를 그렇게 건사했고 ‘국민의 시대’를 살았다. 국가와 개인을 잇는 정체성 연줄을 끊지 않으려면 또 하나의 정체성에 총을 쏴야하는 역설적 순간에 부딪힌다. 일제의 ‘미영귀축’ 명분에 속아서, 또는 강제 징집된 학도병 4385명 중 탈주한 항일투사는 장준하, 김준엽 외 백 수십 명에 불과하다. 광복회회장이 대전현충원 앞에서 백장군 운구행렬을 막아섰다. 에이브람스 한미연합사령관의 전쟁영웅 치사를 ‘내정간섭’이라고도 했다. 미군 3만6574명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산천에서 죽었다. 국민국가는 흔히 이런 모순과 상처를 딛고 일어선다. 백선엽은 국민시대의 주역이었다.

영산전투 5년 후에 고(故)박원순이 거기서 태어났다. 그는 영산중학교,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로 진학했다. 1975년 5월 시위연루로 제적을 당하자 국민이라는 획일적 날줄 사회에 시민이라는 씨줄을 만들기로 작심했다. 날줄과 씨줄로 엮은 피륙이 온전하고 질기다. 유신세대는 종적 연대인 ‘국민’에 횡적 유대인 ‘시민’을 짜 넣는 것에 인생을 걸었다. 1987년을 기점으로 저항운동은 시민운동으로 전환했고 박원순은 그 상징적 인물이 됐다.

백선엽장군이 패주하는 병사를 돌이켜 세웠듯, 인권변호사 박원순은 반독재투쟁에 지친 사람들을 규합해 시민운동의 새로운 전선을 만들었다.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는 운동가들의 활력소이자 시민권의 참호였다. 그는 최장수 시장이 됐다. 9년간 서울은 경제 이권이 시민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인권 도시로 변화했다. 서민중심의 시민권은 그의 소탈한 행보와 어울려 관료적 경직성을 깼다. 그는 거대담론을 싫어하는 살림꾼이었다. 생계현장이 시민정치 이정표이자 그의 삶 자체였다. 말하자면, 그는 ‘시민의 시대’를 개척했고 열었다.

그런데, 왜 느닷없는 작별인가. 왜 작별인사에 ‘시민’은 자취가 없는가. ‘모두 안녕’? 북악산 기슭에서 그의 주검이 발견된 이후 몇 번이고 이 말을 되뇌었다. 생명을 끊어야 했던 그 절절한 이유, 서울 야경과 북악산 밤별들이 극구 말렸을 것임에도 결행해야 했던 작별의 그 순간을 이해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모두 안녕. 친필 유서에 쓰인 ‘모두’와 ‘모든 분’에 ‘서울 시민’의 존재는 결국 흐릿했다. 서울 시민의 마음엔 구멍이 뚫렸다. 심리적 공황상태는 지금도 여전하다.

구차한 변명으로 시민에게 혼란과 절망을 안기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국민성의 핵심가치가 ‘나라 헌신’이고, 시민성의 요체는 집단양심을 위배하지 않는 ‘윤리적 코드’다. 그게 시민의 공적 성격이다. 그런데 시민과 한마디 양해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도려냈다. 그의 비장한 결행은 시민적 공공성과는 거리가 먼 사적 결단이지 결코 공적 행위가 아니다. 친일행적을 딛고 고 백선엽은 국민 약속을 지켰고, 시민시대의 상징 고 박원순은 시민 약속을 어겼다. 촛불을 켠 게 엊그제, 30년 가꿔온 ‘시민의 시대’가 일방적으로 퇴색했다. 슬프고 안타깝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