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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확대냐 흉악범 방지냐···유럽 ‘범죄 청정국’ 안도라 고민

중앙일보

입력

안도라 공국은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인구 7만7000여명의 미니 국가다. 카탈루냐어를 공용어로 쓴다. 안도라 엥캄 마을의 전경. [위키피디아]

안도라 공국은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인구 7만7000여명의 미니 국가다. 카탈루냐어를 공용어로 쓴다. 안도라 엥캄 마을의 전경. [위키피디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 피레네 산맥에 자리한 유럽의 산골 소국(小國) 안도라 공국이 문호 확대를 놓고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다.

코로나 위기 속 EU와 협력 강화 #EU "이민 문턱 낮추라" 요구에 #국민 다수 "흉악범죄 나온다" 반대

안도라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주력 산업인 관광업이 심각한 타격을 받은 가운데 돌파구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15년부터 추진 중인 유럽연합(EU)과 협력을 강화하는 협정 체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8만 명이 채 못 되는 국민 중 상당수가 이를 반대한다. 협정을 체결하면 유럽 각국에서 넘어와 장기 체류하는 사람이 늘면서 흉악 범죄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전과 없는 중산층 이상만 이민 허용

안도라는 '범죄 청정국'이다. 깊은 산속에 모여 사는 주민들은 집이나 자동차 문을 잠그지 않고 생활할 정도로 서로 믿는 편이다. 인구 자체가 적은 탓도 있지만, 그 덕에 교도소 정원은 70명에 불과하다.

주민들은 EU와 일종의 '연합 협정'을 맺으면 치안이 불안해질 것이라 걱정한다. 거주 이전의 자유를 중시하는 EU가 협정의 전제 조건으로 안도라에 이주 문턱을 낮출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일 안도라가 국경 문을 다시 연 가운데 프랑스와의 국경에서 마스크를 쓴 현지 경찰들이 입국 서류와 운전면허증 등을 검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1일 안도라가 국경 문을 다시 연 가운데 프랑스와의 국경에서 마스크를 쓴 현지 경찰들이 입국 서류와 운전면허증 등을 검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현재 안도라는 이민 제도가 엄격한 편이다. 안도라에 직업이 없는 외국인이 살려면 범죄 이력이 없어야 하고, 35만 유로(약 4억9000만원)의 자산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런 장치가 사라지면 "살기 좋은 안도라에 뜨내기들이 몰려올 게 뻔하다"고 주민들은 불안해한다. 연금 생활을 하는 한 남성(66)은 "이 나라에서 흉악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국경 관리 덕분"이라며 "이동의 자유가 허용되면 (분명)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아사히에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왔지만, 그래도 계속 발전해왔다"고 강조했다.

주민들 사이엔 일자리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또 다른 위기감도 있다. 건축사인 중년 남성은 "내가 EU의 어떤 나라에서든 일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만, 거꾸로 EU 국가에서 건축사들이 안도라로 몰려올 수 있다"고 신문에 주장했다. 또 "같은 방식으로 EU 대기업이 안도라에 진출하면 토착 상권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겠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경 열고 쇼핑객 급증했지만… 

안도라 정부도 고심하고 있다. 협정 체결까지 9부 능선 가까이 왔으나, EU와 협상을 마무리 짓지 못하는 건 이런 여론 때문이다.

물론 안도라 정부는 관광으로 먹고산다는 점에서 EU와 밀착이 절실하다고 본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경제 위기가 장기화할 것이란 예상에 더 초조해졌다.

최근 경기 추세 속에 이런 안도라의 위기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럽 내에서도 도드라지게 피해가 컸던 이웃국 프랑스와 스페인의 감염 상황은 안도라 경제를 직격했다. 두 나라와 국경을 닫았던 지난 2월엔 구직자가 300명에서 1700명으로 껑충 뛰었다.

국경 도시인 안도라의 파스 데라 까사에서 프랑스인들이 생필품을 사들고 이동하고 있다. 안도라가 국경을 개방하자 소비세가 낮은 안도라로 쇼핑에 나선 프랑스인이 급증했다. [AFP=연합뉴스]

국경 도시인 안도라의 파스 데라 까사에서 프랑스인들이 생필품을 사들고 이동하고 있다. 안도라가 국경을 개방하자 소비세가 낮은 안도라로 쇼핑에 나선 프랑스인이 급증했다. [AFP=연합뉴스]

그런데 지난달 1일, 2개월 반 만에 국경을 다시 열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세율이 낮은 안도라에서 술·담배·휘발유 등을 사기 위해 프랑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프랑스에서 안도라로 가는 산길이 수 ㎞의 정체 현상을 빚을 정도였다.

안도라의 소비세는 4.5%, 프랑스는 20%다. 일례로 프랑스에서 77유로(약 10만8000원)인 담배 한 보루를 안도라 면세점에선 28.9유로(약 4만원)에 살 수 있다.

그래서 안도라 정부는 전체 고용의 4분의 1 가까이 차지하는 이런 면세 사업이 언제든 다시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 최근 또다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확진자가 급증하는 '제2파' 양상을 띠는 것도 불안감을 부채질한다.

◇국민 반대해도 협정에 올인

안도라 정부는 고용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정보기술(IT) 부품, 의치 등 다른 국내 산업을 키우려 한다. 그러려면 EU와 무관세 협정을 맺어 수출을 늘릴 필요가 있다.

안도라의 한 슈퍼마켓 내부에 담배가 쌓여 있는 모습. 상점에선 "프랑스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담배를 살 수 있다"고 선전한다. [AFP=연합뉴스]

안도라의 한 슈퍼마켓 내부에 담배가 쌓여 있는 모습. 상점에선 "프랑스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담배를 살 수 있다"고 선전한다. [AFP=연합뉴스]

한때 안도라는 EU 가입도 검토했다. 하지만 분담금 지급 능력, EU 각 기관에 파견할 인원 부족 등의 이유로 포기했다고 한다. 여기엔 오랫동안 조세회피처(tax haven)로 악명을 떨치다가 세제 개편 이후인 2018년에야 EU의 '그레이 리스트'에서 벗어난 전력도 영향을 미쳤다.

안도라 정부는 국민 반대에도 협정은 반드시 맺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앙드리 리바 안도라 EU 담당 장관은 아사히와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제2파가 오면 국가 재정이 견디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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