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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놈을 아십니까?

중앙일보

입력

보건복지부장관이 교통사고 예방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일지도 모른다.

작년 6월 클린턴 前미국대통령과 블레어 영국총리가 지놈 초안의 완성을 공동발표한 이래 지놈은 언론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과학용어가 됐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교양인 행세를 하려면 지놈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지놈과 관련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게놈과 어떻게 다르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놈과 게놈은 표기법상의 차이일 뿐 서로 같은 뜻을 지닌 단어다.

현재 중앙일보와 매일경제신문만 지놈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다른 언론기관은 모두 게놈으로 표기하고 있다.

지놈genome이란 유전자를 뜻하는 gene의 어두와 염색체를 뜻하는 chromosome의 어미를 합쳐 만든 합성어로 1930년 독일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전세계 과학을 주도하면서 비루스가 바이러스로, 에네르기가 에너지로 변모했듯 genome은 자연스럽게 영어식 발음인 지놈으로 표준화됐다. 독일 과학자들도 국제학회에선 모두 지놈으로 발음할 정도다.

악법도 법이며 표기법도 사회적 약속이므로 종전대로 게놈을 따라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지놈은 학술용어이니 만큼 학계 등 전문가들의 의견대로 지놈으로 바꿔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유독 국내 언론만 이미 국제 학계에서 용도폐기된 독일과 일본식 발음인 게놈을 고집하고 있다.

그동안 일부 양식있는 학자들이 표기를 바꿔야 한다는 건의를 줄곧 했지만 번번이 묵살됐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그렇게 써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표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의 무성의는 한국인들에게 숱한 시행착오를 불러일으켜 왔다. 필자 역시 해외취재의 현장에서 게놈이란 한국 기자들의 발음에 갸우뚱하는 외국인 학자들을 숱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신문과 방송에서 잇따라 터져나오는 게놈이란 잘못된 용어가 학생들의 귀에 조건반사화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미국식 용어를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도 있지만 세계의 표준을 따르는 것은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당연한 조치이며 사대주의의 산물은 더더구나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이제 와서 고친다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매도 일찍 맞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생명공학시대의 도래와 함께 지놈은 일반인들이 가장 자주 듣는 과학용어 중 하나가 됐다. 과학용어의 생명은 정확한 표기에 있으며 기성세대는 학생들에게 이를 제대로 가르칠 의무가 있다.

이 점에서 중앙일보와 매일경제신문에서 게놈을 지놈으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뒤늦게나마 매우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인체지놈사업이란 美국립보건원 인체지놈연구소National Human Genome Research Institute, NHGRI를 주축으로 15개국 1만5천여 명의 과학자들이 모여 만든 다국적 컨소시엄이 30억 쌍에 달하는 인간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모두 밝혀내기 위해 90년대 초부터 시작한 초거대 과학프로젝트다.

여기엔 모두 30억 달러란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 규모 면에서 원자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프로젝트나 달착륙을 위한 아폴로프로젝트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년 6월 99.99%의 정확도로 95%의 염기서열을 밝혀낸 이른바 草案의 완성 이래, 올해 2월 해독률을 99%까지 끌어올림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인체지놈사업이 완성된 것이다.

鹽基염기란 유전자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로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의 4종류가 있다. 바이러스에서 인간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는 이들 4가지 염기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인간이 창조한 디지털 정보가 0과 1의 반복으로 이뤄진 2진법임을 감안할 때 사람의 숫자는 2이지만 조물주가 선택한 숫자는 4가 되는 셈이다.

인간의 세포핵 속엔 유전자를 담고있는 그릇에 해당하는 염색체가 46개 있으며 이 속에 3만여 개의 유전자가 차곡차곡 담겨있다.

하나의 유전자는 다시 수천 내지 수만 개의 염기로 이뤄진다. 인체를 건축물에 비유할 때 염기가 벽돌이나 나사의 설계도라면 유전자는 창문이나 계단, 기둥 등 구체적인 조형물의 설계도다.

인체는 모두 30억 쌍(부모 양쪽으로부터 각각 30억 개를 물려받는다)의 염기로 구성되며 이들의 순서에 의해 키와 피부색깔 등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 결정된다.

인체지놈사업은 조물주가 창조한 인체 설계도를 낱낱이 밝혀내는 바벨탑 공사에 비유된다. 그렇다면 인체지놈사업의 완성은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우선 밝은 면부터 예상해보자. 가장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으로 보는 것이 맞춤형 新藥의 보급으로 약물 부작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약물 부작용은 복용한 뒤에야 알 수 있는 死後藥方文격이었다. 누구도 1백만 분의 1이라는 페니실린 쇼크의 부작용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유전 정보를 이용해 체질에 맞는 약만 골라 복용하게 되면 약물 부작용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

건강검진시 질병의 발생 확률을 미리 알아내는 豫報制도 가능하다. 혈액 한 방울만 DNA칩 위에 떨어뜨리면 “10년 후 위암에 걸릴 확률이 20분의 1”이라는 식의 확률로 계산돼 나온다.

위암 유전자가 있는 사람은 평소 짠 음식을 줄이는 등 위암 예방에 노력하고, 다른 사람이 1년에 한번 받는 내시경 검사를 6개월에 한번씩 받는 것으로 조기발견에 힘쓸 수 있다.

그동안 對症療法밖에 없었던 알레르기 질환도 완치된다. 예컨대 집먼지진드기에 과민한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바꿔주는 것이다.

이는 인류가 수백만 년 동안 숙명처럼 안고 살아온, 대물림되는 체질마저 극복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마약이 법적 인정을 받게 되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지놈 혁명으로 중독 유전자가 규명됐기 때문이다. 중독 유전자를 파괴하는 효소를 찾아냄으로써 인류는 마약의 쾌락은 자유자재로 즐기지만 중독의 굴레에선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게 된다.

30억 쌍의 염기서열을 모두 담은 전자주민증이 국민에게 발급된다. 응급사고로 병원에 가면 전자주민증에 들어있는 자신의 유전자와 일치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세포들을 이식받을 수 있다.

배아복제기술의 발달로 모든 병원은 간과 폐 등 응급치료에 필요한 장기들을 시험관에 세포의 형태로 보관하는 것이 의무화된다.

그동안 난공불락의 질환이었던 암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암세포만을 골라 죽이는 꿈의 면역세포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등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암을 주사 한방으로 없앨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종양내과 의사들은 대부분 실직하거나 암세포가 지닌 불사의 특성을 노화 극복에 응용하기 위한 연구로 전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놈혁명의 이면엔 어두운 구석도 있다. 유전정보의 공개로 수년 후 대머리가 될 확률이 90%인 사람이라면 약혼자로부터 유전 정보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고 난처해할 수 있다.

보험 가입과 채용 기준도 뿌리째 달라진다. 현재 병이 없더라도 질병 유전자를 가진 사람에게는 보험 가입과 채용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유전 정보의 공개를 법적으로 금지한다지만 간단한 혈액검사만으로 유전자 진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를 막기 어렵다.

빈부격차도 문제다. 10만 개가 집적된 보급형보다 1백만 개가 집적된 고성능 DNA칩으로 검진을 받으려면 한 달치 월급을 모두 내야 할지도 모른다.

유전자 차별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優良유전자일수록 권력있고 부유한 계층에 독점되기 때문이다.

대대손손 대물림되는 유전자의 속성상 우량유전자 독점현상이 누적되면 열등유전자를 지닌 가계는 영원히 열등한, 말 그대로 현대판 노예제도가 부활할지도 모른다.

독감이 유행해 한달 만에 1백만 명이 생명을 잃는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최첨단 독감 치료제를 동원해보지만 속수무책이다.

이유는 대부분의 인간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미남미녀 등 특정 유전자만을 갖추느라 인구집단이 독감에 저항할 수 있는 생물학적 다양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유명 인사들의 유골이 수난당하기도 한다. 뼈나 머리카락에 남아 있는 미량의 DNA만으로도 유전자 분석이 가능하다.

생체실험을 할 수 없으므로 특정 재능을 가진 유명 인사들의 유골이 대상이 된다. 담배회사에선 영국의 철학자 러셀의 유골을 분석한 결과를 내놓고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다.

러셀은 체인 스모커chain smoker(줄담배 피우는 골초)였지만 98세까지 장수했다. 과학자라면 아인슈타인의, 운동선수라면 타이거 우즈나 마이클 조던의 유전자를 분석할 것이다.

이 점에서 음악계는 슬프다. 베토벤의 유골은 있지만 모차르트의 유골은 없기 때문이다.

분석 대상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이어야 하는데 베토벤은 소문난 자수성가형 노력가다. 연예인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뛴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델 유전자를 미리 확보하려는 유전공학회사들의 제의가 몰려들기 때문이다.

단신의 톰 크루즈는 키보다 코가, 삐쩍 마른 기네스 팰트로는 몸매보다 고혹적인 눈이 대상이다.

이들은 혈액 한 방울이나 머리카락 한 가닥만으로 자신의 유전자에 대해 수억 달러의 개런티를 요구한다. 이들의 외모를 닮은 자녀를 원하는 부모들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 분쟁도 발생한다. 머리 좋은 버나드 쇼와 잘 생긴 마릴린 먼로를 닮은 아이를 만들려고 했으나 자칫 실수해 머리가 나쁘고 못생긴 아이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신의 자녀라도 부모가 수정란을 조작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안을 발표한다.

그러나 태아 성감별처럼 많은 부모가 비공식적으로 잘 생기고 머리좋은 슈퍼 아기를 낳기 위해 막대한 돈을 지불해 사회문제로 부각된다.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들도 곳곳에서 벌어진다. 엉뚱하지만 보건복지부장관이 교통사고 예방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사망 원인 질환 1위와 2위를 차지했던 암과 뇌졸중이 유전자 치료를 통해 현저히 감소한 반면 교통사고가 부동의 사망 원인 1위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만은 지놈 혁명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유일한 사망 원인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교통사고도 인간의 조급한 마음 탓이라며 조급성을 조절하는 신경전달 물질의 유전자를 찾아내는 연구에 착수할 것이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하이브리드hybrid 인간이 출현한다.

하이브리드 인간이란 여러 인종의 유전자를 짜깁기한 인간이다. 머리카락은 흰색인데 피부는 노랗고 눈동자는 파란 인간이 탄생한다.

진화론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합성유전자도 등장한다. 인간은 왜 개처럼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가에 대한 원초적 불만이 동기다. 개의 후각세포를 주관하는 유전자를 사람의 유전자와 합성해 이식해준다.

과학자들은 권태 유전자를 찾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지놈 혁명으로 무병장수의 시대를 謳歌하는 인류에게 권태가 최대의 적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태는 유전자가 아니라 학습, 교육 등 후천적 요인이 결정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입증돼 난관에 봉착한다. 다시 종교와 철학이 고개를 들고 인류는 기원전의 소크라테스나 孔子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 모르겠다.

밝은 쪽이 되었든 어두운 쪽이 되었든 지놈혁명의 도도한 흐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에서 일방적인 미국의 독주는 우려할 만하다. 정보통신은 물론 미래의 경쟁력인 지놈 패권까지 장악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오래 전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용어조차 생소했던 1988년부터 미국정부는 지놈을 국가주도형 과학사업으로 책정해 대규모 연구비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전체 염기서열의 85%를 미국이 밝혀냈다.

그나마 다른 국가의 역할은 단순한 하청작업에 불과했을 뿐 지놈관련 핵심기술은 대부분 미국이 보유하고 있다. 말이 다국적 컨소시엄이지 인체지놈사업에서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는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정부뿐 아니라 민간기업의 활동도 미국의 독무대다. 1억 달러나 되는 초고성능 슈퍼컴퓨터와 우리 나라엔 10대가 채 안되는 자동염기서열분석기를 무려 3백여 대나 갖추고 노벨의학상 수상자를 포함한 박사급 연구인력만 60명을 확보한 미국의 생명공학회사 셀레라 지노믹스Celera Genomics가 대표적 사례다.

지금까지 인체지놈사업으로 규명된 염기서열은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

그러나 수십억 달러가 들어간 첨단연구분야에 무임승차란 있을 수 없으며 열매는 씨를 뿌린 자가 거두기 마련이다. 어쩌면 지금은 한가하게 지놈혁명의 부작용을 걱정할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국가적 역량을 집결해 지놈 전선에 뛰어들어도 때늦은 감이 있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척 미국이 던져주는 떡 부스러기나 받아먹고 살아야만 하는 유전자 종속국가가 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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