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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위성락의 한반도평화워치

좌초 위기 비핵화 협상, 북·미 실무대화로 돌파구 찾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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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반도 비핵 평화 살리려면

지난해 2월 28일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비핵화 협상이 좌초 위기에 빠진 가운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동력을 북·미 실무대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AP=연합뉴스]

지난해 2월 28일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비핵화 협상이 좌초 위기에 빠진 가운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동력을 북·미 실무대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AP=연합뉴스]

2018년 이래 남·북·미 사이에 전개돼온 정상 차원의 비핵 평화 외교는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자칫하면 외교는 좌초하고 위기가 닥칠 수 있다.

남북 협력 앞세우면 북한 호응 없이 한·미 이견만 커져 #교착 국면 타개의 원동력은 북·미 실무대화에서 찾아야 #대선 열세인 트럼프에게 북·미 회담의 필요성 설득하고 #중국 동원해 북한의 요구 수위 낮추고 대화 나서게 해야

그간 남북 정상외교와 북·미 정상외교는 각기 시차를 두고 상이한 궤적으로 부침했다. 그러나 결국 둘 다 중단됐다. 세부적으로 보면 남북 관계는 단절됐다가 급기야 파탄 과정으로 진입했다. 물론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 연락 사무소 폭파까지 간 파탄 과정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개입으로 일단 정지됐다. 미·북 관계는 단절까지는 아니지만, 대화 부재 상태다. 북한은 미국의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면서 전략무기 발사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코로나19라는 환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어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 한편 남·북·미 정상 외교의 주 행위자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재선에 골몰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 북한이 대남 관계 파탄 작업을 재개하고 대미 도발을 할 소지가 커진다. 그러면 위기가 올 수 있다. 선거에서 열세에 몰린 트럼프가 하기에 따라서는 격변이 생길 가능성도 없지 않다.그러므로 향후 한·미의 대처는 사태 향배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위기 국면이 이어질 경우 피해가 한국에 밀어닥칠 수 있다. 한국 정부로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비핵 평화 프로세스가 무위로 돌아가는 상황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비핵화 협상 성찰하고 새 접근 나서야

이상적으로는 남·북·미 모두 현 국면 타개를 위해 2018년 이후 협상을 성찰하고 기존 접근을 조정해 새로운 접근을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래 승리주의에 도취한 북한이 그럴 리 없다. 오히려 북한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입장을 경화시켰다. 하노이에서 제시한 ‘영변 vs 제재 해제’ 안을 철회하고, ‘대북 적대시 정책 철폐 vs 비핵화 협상 재개’로 요구 수위를 높였다.

교조적인 북한은 그렇다 치자. 흥미로운 것은 한국과 미국도 기존 입장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최근 외교·안보 인사 개편을 보면 여전히 남북 대화를 살려 2018년의 영화를 재현하려는 듯하다. 이 접근이 먹히려면 2018년처럼 북한이 남한의 제안에 호응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남한과의 거래를 거부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자세도 새롭지 않다. 최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한·일 순방이 이를 여실히 보여줬다. 비건은 새로운 구상 없이 비핵화와 대화 재개에 관한 기존 입장을 재천명했다. 북한 외무성 최선희 제1부상을 공개 비판한 것이 유일하게 새로운 점이었다. 이처럼 선거 와중의 미국은 현 국면을 타개하는 데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이후 북한은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담화로 반응했다. 여전히 기존 입장을 견지하는 내용이다. 역시 트럼프와의 회담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북한식 조건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적대적 조치를 비난하며 도발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다. 북한이 도발할 마음만 먹으면 빌미는 널려있다. 북한 셈법에 따르면 한·미 연합훈련은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유예와 맞물려 있으니 훈련이 재개되면 도발할 수 있다.

남·북·미가 기존 관성에 매여 있으면 사태는 악화하기 쉽다. 그러면 한국은 직접적인 부담을 안게 된다. 이러니 한국이 나설 수밖에 없다. 면밀한 대처가 긴요하다.

현 상황을 타개하려면 우선 대화를 복원시켜야 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종래와 같이 남북 대화와 협력을 앞세우는 접근을 하면 북한의 호응을 얻지도 못하고 한·미 이견만 키울 소지가 있다. 차라리 국면 타개의 동력은 북·미 실무대화에서 찾아야 한다. 정상회담은 그다음이다. 먼저 북·미 간 실무 만남을 성사시키고 그 선순환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남·북을 복원시키는 것이 낫다.

현재 국면은 위기로 가는 초입

북·미를 대좌시키려면 북·미 모두에 유연성을 가지라고 설득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나 달리 대안이 없으니 시도해야 한다. 미국에 대해서는 한국이 약간의 유연성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북한과의 대화에 관심을 가질 소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열세인 트럼프로서는 북한의 도발로 자신의 정상외교 성과가 무너지면 더 타격을 입게 된다. 미·북 대좌를 통해 그런 상황을 막을 수 있다면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약간의 유연성을 발휘하더라도 북한의 기대에는 못 미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북한의 유연성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북한의 유연성을 설득할 방도는 없다. 그러니 이 부분은 중국을 동원해 북한의 요구 수위를 낮추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다. 중국으로서도 한반도 위기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도 북·미 대화를 자기식으로 견인하고자 과잉 대처하다가 미국의 반격에 직면하는 일은 좋은 게 아니다. 도발 카드를 잘못 운영해 트럼프가 낙선하는 일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중국의 설득이 먹힐 소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현 국면은 위기로 가는 초입이다. 대처 방안의 첫 단계는 대화 복원이고, 그 대상은 북·미 대화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미국과 북한에 대화 재개에 공통의 이익이 있음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이 길을 가려면 우선 한국 스스로 현 상황에 대한 엄중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종래와 다른 접근을 시도할 의지도 있어야 한다. 사실 새로운 접근은 연초부터 해야 했다. 6개월이 그냥 흘러갔다. 이제 서둘러야 한다.

김여정의 7·10 담화로 보는 북한의 속내

김여정. [연합뉴스]

김여정.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의 담화는 최근 어떤 북한 발표보다도 현안에 대한 북한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담화라기보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기술된 수필 같은 이 글에서 김여정과 북한 지도부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먼저, 담화 도처에 김정은과 트럼프의 관계가 강조되고 있다. 김여정은 북한이 아직 도발하지 않은 배경에 지도자 간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또 “트럼프의 사업에서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원한다”는 김정은의 인사말을 전했다. 지금 트럼프가 선거 사업을 하고 있으니, 이 인사는 재선 기원에 다름이 아니다. 트럼프에 대한 북한의 기대가 묻어난다. 그러나 김여정은 미국은 북한을 적대시하게 돼 있으므로 트럼프와의 관계만 믿고 핵 계획을 조정하면 안 된다고 했다. 김여정이 배드 캅(Bad Cop, 나쁜 경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둘째, 김여정은 북·미 정상회담을 수락해서는 안 되며 올해 회담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수뇌의 결심에 따라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대화 재개는 미국의 태도 변화를 보고 결심할 문제라고도 했다. 전반적으로 정상회담을 기대하면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주문하는데 방점이 있어 보인다.

셋째, 김여정은 도발은 미국의 처신에 달렸으며, 미국의 압박을 좌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주권 수호 능력을 발전시켜 나간다고도 하였다. 도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넷째, 김여정은 비핵화는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못 한다고 했다. 또 하노이에서 북한이 제안한 ‘영변 핵시설 해체 vs 대북 제재 해제’ 안이 북한의 핵 중추를 마비시킬 뻔했다면서 이를 깎아내렸다. 이제부터는 ‘대북 적대시 철회 vs 북·미 협상 재개’가 협상 틀이라고 했다. 스몰 딜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다. 비핵화 관련 입장 경화가 관찰된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