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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훈] 금과 달러가 걸어온 길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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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셔터스톡]

[한대훈의 투(자 이야)기]금과 달러가 걸어온 길①- 금, 1차산업혁명과 영국의 파운드 버블의 시대다. 코로나19의 충격을 각국은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주요국 증시는 빠르게 반등했고, 무차별적인 유동성의 공급으로 대부분의 자산가격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금과 주식가격이 같이 오르고, 금과 채권 가격이 같이 오르는 등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던 자산배분 포트폴리오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버블의 시대에 소외 받고 있는 자산이 있으니, 바로 비트코인이다. 화폐가치 하락의 대안으로 금과 함께 부각되었고, 유동성의 공급(신규계좌 개설), 여러 대내외적인 모멘텀(페이팔, 특금법 등)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횡보세를 보이고 있다. 디지털 금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아직까진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금, 달러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 앞에서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고, 금과 달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주말 동안 고민한 내용을 칼럼으로 정리했다. 3~4차례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콜럼버스의 대항해는 지금의 우주산업이었다?

콜럼버스의 대항해로 시작된 식민지 산업은 사실 15세기말 처음 제안됐을 때만 하더라도 그다지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지금으로 이해하자면 우주항공산업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현재의 일론 머스크와 Space X와 같은 취급이었다. 막대한 투자금과 리스크 대비 실질적으로 얻어낼 만한 게 있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취급을 받았다. 그렇기에 이탈리아인이었던 콜럼버스는 자국이 아닌 스페인 왕궁으로부터 항해비용을 지원받아 신대륙 발견에 나섰다. 그나마도 스페인 왕궁 역시 콜럼버스의 계획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놀랍게도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이어지자 스페인은 유럽 최강의 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은 이탈리아였다. 그들은 로마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지중해 지역의 패권국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고 있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렌체(Firenze), 베네치아(Venezia), 밀라노(Milano) 등은 경제대도시임과 동시에 문화, 종교, 예술 모든 측면에서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거상이자 大금융인으로서 잘 알려진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문 역시 이 당시에 위상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가로지른 신대륙 발견에 성공하자, 갑작스럽게 유럽의 무역항로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게 된다. 즉 무역과 경제의 패권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게 된 셈이었다. 특히 중국의 차(tea), 아메리카 대륙의 담배ㆍ커피ㆍ코코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사탕수수에 대한 교역량은 전례 없이 폭증하면서 스페인과 대서양 무역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인이었던 콜럼버스가 자국 경제의 붕괴와 옆 나라인 스페인의 급부상을 직접적으로 견인했던 셈이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의 나비효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스페인의 등장은 화폐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제공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로부터 실어온, 사실상 탈취해온 상품 중에는 금과 은 또한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방점을 찍은 사건은 현재의 볼리비아 지역인 포토시(Potosi) 은광의 개발이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이후 16세기 초반부터 스페인의 막대한 식민지 사업이 전개가 되었고, 16세기 후반에 발견된 곳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은광이었던 포토시였다. 본격적으로 개발된 이후로 한 때 세계 은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채굴된 은은 당연히 스페인으로 모두 유입되었고, 이를 통해 16세기 후반 스페인이 보유한 금과 은의 양은 전 세계의 83%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스페인은 이 막대하게 유입된 금과 은을 직접 보유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과 식민지 개발에 너무 많은 빚을 졌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의 추정에 따르면 당시 스페인은 국가 수입의 70%를 전쟁 비용에 썼다고도 한다. 결국 합스부르크가문은 이렇게 유입된 금과 은을 대다수 채권자와 은행가들에게 빚을 갚기 위해 지불한다. 이로 인해 2가지 매우 의미 있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첫 번째는 ‘가격혁명’이다. 스페인으로 유입된 은이 곧바로 다른 유럽국가들에게도 살포되다시피 퍼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 16세기 후반 유럽의 물가는 두 배, 심하게는 세 배까지 폭등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두 번째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인플레이션을 통해 유럽 내에서 화폐가치에 대한 ‘신뢰’가 지속적으로 의문시되면서 결국 신뢰할 만한 실물 내지는 경제력을 보유한 국가, 그리고 그들의 화폐는 무엇이 될 것이냐는 의문이 근본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스페인은 유럽 내에서의 국제적인 신뢰도에 있어서는 거의 추락 수준을 맞이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식민지 산업을 통해 부흥하게 된 그들의 경제력은 반대로 매우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산업이라는 ‘해외 약탈’에 치중한 나머지 ‘국내 기간산업’은 사실상 황폐화가 되어 있었다. 너도 나도 본토를 떠나 해외 항로개척에만 매달렸으니 당연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가격혁명의 최대 피해자는 이를 만들어낸 스페인으로 마무리가 된다.

#영국의 부상

그렇다면 그 다음은 누구였을까? 15세기까지의 이탈리아, 16~17세기의 스페인의 뒤를 이어 유럽의 패권을 거머쥘 국가는 누구였을까? 바로 이 때 등장하는 국가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 내 변두리 국가이자 빈곤국가였던 영국이다. 

영국은 유럽의 중심 주변에도 못 있었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의해, 그리고 그들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를 필두로 하여 무찌르면서 해상강국 지위로 올라섰다. 

중요한 것은 그들 역시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아온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의 노예무역은 대단히 큰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1770년에서 1840년대까지 노예무역이 영국 GNP에서 무려 5%였다고 한다. 이 내용이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실 또한 존재한다. 1833년 노예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영국정부는 노예를 보유하고 있던 3,000가구에게 당시 2,000만 파운드를 보상했다고 한다. 당시 영국의 GDP가 3.8억 파운드 가량이었으니 이에 대입해보면 5.2%, 앞서 언급한 것과 유사한 수치가 산출된다. 

#증기기관의 등장

엘리자베스 여왕, 프랜시스 드레이크, 해상강국으로서 유럽의 무역을 장악하며 새롭게 강국대열에 떠오르게 된 영국. 그런 그들에게는 무역이라는 요소보다 더욱 그들의 부를 막강하게 축적하게 된 강력한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1차 산업혁명, 그리고 이 것을 가능하게 했던 획기적인 기계의 등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증기기관’이다.

이 증기기관의 발전이 광업(mining)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 화폐 역사에 있어서는 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증기기관으로 광물 생산량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금과 은의 보유량이 증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실제 광물산업의 발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1차 산업혁명 상 인쇄, 직물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인데, 1700년을 기준으로 하여 영국 주요산업의 생산지수를 로그화해서 나타내볼 경우, 1870년 수치가 철강(13,679), 광산업(6,178) 등으로서 인쇄(668), 직물(214) 등을 압도적으로 뛰어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금ㆍ은의 생산증대폭도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영국은 유럽 내 최대 금/은 보유국으로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18세기 전후로 발발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즉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여기서 증기기관의 힘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 이후로 1793년부터 1815년까지 나폴레옹 중심의 프랑스 VS 반(反)프랑스연합이 펼친 전쟁으로 요약할 수 있는 나폴레옹 전쟁은, 결국 그 유명한 워털루(Waterloo) 전투 이후 영국 중심의 연합국 승리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양 측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힘과 동시에 정부의 재정부족문제를 발생시켰다. 실제로 승전국인 영국에서마저도 전쟁비용과 위험으로 인한 금 보유고 부족문제가 발생하여 1797년부터 1821년까지 금태환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즉, 당시 화폐발행의 기본이 되는 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그렇지만 18세기 중반 이후 증기기관의 보급이 본격화되고 이로 인해 광산에서 금 생산량의 급증이 발생하자 금본위제를 다시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1차 산업혁명의 증기기관은 영국 국부의 증대를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채굴(mining) 기술의 발전을 통해 금본위 체제하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금 부족 문제까지 해결하는 역할을 해냈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뉴턴이 금본위제의 아버지였다

단순히 영국이 무역발전과 1차 산업혁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금ㆍ은을 확보했다는 사실 만으로는 화폐 역사에 그다지 큰 의미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이 시대에서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획기적인 발상을 현실화하는데 성공한다. 그 중심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있었다. 그가 화폐역사에 의미 있는 한 획을 긋게 된 아이디어로서 제시한 것은 바로 ‘금본위제’였다.

뉴턴은 희대의 천재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뽐낸 인물이다. 다빈치가 15세기 이탈리아의 전성기를 대변한다는 부분과 뉴턴이 18세기 영국의 전성기를 대변한다는 부분 또한 흥미로운 유사성을 지닌다. 그러한 뉴턴은 물리학자로서뿐만 아니라 1696년부터 영국 조폐국에 감사의 신분으로서 몸을 담게 된다. 이후 국장으로까지 승진하게 된 그는, 1717년 금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통화, 즉 사실상의 ‘금본위제’를 제시하게 된다.

1717년 뉴턴이 영국 재무부에 건의한 3가지 부분은 다음과 같다. ① 영국에서는 은이 계속 유출되는 상황이고, ② 반대로 금은 신대륙으로부터 계속 값싸게 유입되고 있으며, ③ 현재 부족한 주화를 지폐로 대체하려면 지폐의 ‘신용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화폐에 있어서 ‘신용’이라는 매우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꿰뚫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방법론적으로도 금에 대한 당시의 신뢰, 신용을 바탕으로 하여 지폐를 발행하자는 의견을 명확히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뉴턴은 해당 이론을 바탕으로 1717년 기존의 다양한 금화를 21실링 가치의 기니금화(gold guinea)로 통일해 주조했다. 이후 1세기 가까이 기축금화로서 유통이 되었고, 1817년에 정확하게 1파운드의 가치를 지닌 소버린 금화(gold sovereign)가 등장하면서 영국의 금본위제도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를 기반으로 차후 100년 간 영국의 파운드는 세계 기축통화자리에 오르게 됐다.

결국 1차 산업혁명 당시의 화폐 역사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7~18세기 영국 이전에도 이탈리아와 스페인 같은 유럽의 경제부국들은 존재했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영국은 아이작 뉴턴이라는 존재를 필두로 금과 신용이라는 가치를 통해 금본위제 기반의 기축통화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 과거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렇게 앞서 설명한 1817년 소버린 금화의 등장은 실질적인 금본위제의 시작 지점이 된다. 

이 때 중요한 요인으로서 작용한 것은 영국이 1차 산업혁명의 종주국임과 동시에 세계무역의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의 ‘신용’을 구축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축적한 ‘금(gold)’은 그 신용의 결정체가 된다. 결국 전 세계의 다양한 국가들은 국가 간 혹은 이종산업 간 거래에 있어서 막대한 금 보유고를 바탕으로 한 화폐발행 시스템을 갖춘 영국의 파운드를 가장 선호(신뢰)하게 되고, 바로 이 부분이 영국 파운드가 전 세계의 기축통화로 떠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세기 초반 런던 금융 시장은 전 세계 투자의 절반을 소화했으며, 덩달아 영국의 파운드화는 세계 무역 중 60%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무역이 폭발적으로 증대하면서 급격한 경제성장이 나타날 때였고, 데이터로 확인해보더라도 글로벌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840년대 3.9%에서 1880년대 11.9%까지 급성장세를 보였다.

한대훈 SK증권 애널리스트, 『넥스트 파이낸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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