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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피’에 양도세까지?…해외주식 ‘직구’ 몰리는 개미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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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호 14면

직장인 김경석(46)씨는 올 초 주당 524.86달러에 테슬라 주식 2000만원어치를 ‘직접구매(직구)’했다. 기존에 이용하던 국내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서 어렵지 않게 매수했다. 그가 산 테슬라 주가는 8일 1365.88달러를 기록했다. 반 년 사이 주가가 배 이상으로 오르면서 쏠쏠한 투자가 됐다. 김씨는 “자율주행차 같은 테슬라의 미래 지향적 사업 포트폴리오를 눈여겨보던 차에 직구도 쉬워 망설임 없이 투자했다”며 “성과가 좋아 다른 해외 주식 몇 종목도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답답한 코스피 탈출, 결제액 85조 #테슬라 5640억원 순매수 1위에 #“공매도 재개, 국내 고집 이유 없어” #양도세 부과 방침에 반발 심리도 #국내 시장 투자동력 줄어들 우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세계 경기 불확실성이 더 커진 가운데 김씨 같은 국내 개인 투자자, 이른바 ‘개미’ 사이에서 해외 주식 직구 열풍이 불고 있다. 9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의 올 상반기 국내 증권사를 통한 해외 주식 결제(매수+매도)액은 709억 달러(약 85조원)에 이르렀다. 역대 최대치였던 지난해 총 결제액(409억 달러)의 1.7배 규모가 이미 상반기에 거래된 것이다. 2017년 227억 달러, 2018년 325억 달러였던 데 비해서도 결제액 증가세가 뚜렷하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미국 주식이 특히 인기였다. 올 상반기 전체 결제액의 87%가량을 차지했다. 홍콩·중국·일본 주식이 뒤를 이었다. 종목별 순매수액은 성장성으로 주목받는 테슬라가 4억7011만 달러(약 5640억원)로 1위였다. 정보통신기술(ICT) 공룡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근소한 차이로 2~3위를 기록했고, 하스브로(완구 기업)·알파벳(구글의 모기업)·월트디즈니·페이스북·아마존 등도 매수 상위권을 기록했다. 중국 기업 중엔 알리바바(전자상거래업)가, 일본 기업 중엔 쇼와덴코(화학업)가 개미들을 사로잡았다.

개미들이 이처럼 해외 주식 직구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뭘까. 우선 지정학적 리스크나 기관·외인 투자자의 공매도 등 투자심리를 위축시키는 각종 요인 속에 10년째 거의 ‘박스피(박스권+코스피)’로 제자리걸음 중인 국내 주식시장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9일 현재 코스피는 2100포인트대로 9년 전인 2011년 수치와 엇비슷하다. 이와 달리 해외 주가는 훨훨 날아올랐다. 미국 나스닥 지수는 10년간 2100포인트에서 1만300포인트로, 일본 니케이225 지수는 9500포인트에서 2만2400포인트로 껑충 뛰었다. 나스닥은 3개월 전의 7000포인트대에서 계속 올라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를 무색케 했다.

최근 해외 주식 직구에 뛰어든 연승훈(38·가명)씨는 “삼성전자 주가가 1년 사이 겨우 20%가량 오를 동안 아마존 주가는 50%나 뛰었다”며 “코로나19에 한시적으로 금지됐던 공매도도 9월부터 재개되는데 국내 주식만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영한 대신증권 연구원은 “코로나19에 언택트(비대면) 산업 수요가 급증했는데 아직 국내보다 해외 ICT 기업들이 이에 부응, 성장성을 더 어필하고 있는 것도 해외 주식 직구 열풍의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이 연구원은 “클라우드와 데이터센터 같은 언택트 산업 핵심 인프라를 잘 갖춘 해외 기업들의 고성장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경기 불확실성 심화에 따른 분산투자 목적으로 해외 주식 직구가 인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예컨대 최근 5년간 꾸준히 오르던 금값은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5월 중순부터 오름세가 한풀 꺾였다. 국내 금 시세는 이달 들어 5월 고점 수준을 회복했지만 지난 달엔 4월 수준까지 다시 하락하는 등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도 하락세다. 5월 말 1240원대에서 현재 1195원선까지 떨어졌다. 코로나19 재확산 우려에 안전자산인 금과 달러가 이처럼 단기적으로는 불안정해졌기에 성장 잠재력 큰 해외 기업에 분산투자하려는 수요가 늘었다는 분석이다. 상반기 중에서도 1분기보다 2분기에 해외 주식 결제액이 더 늘어난 것이 이 같은 심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정부가 내놓은 금융세제 선진화 추진안에 대한 반발 심리로 해외에 눈을 돌리는 개미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추진안에 따르면 정부는 2023년부터 국내 주식의 양도차익 과세를 강화하기로 했다. 이 경우 소액주주라도 양도차익이 2000만원을 넘으면 20%, 3억원을 넘으면 25%씩 세금으로 내야 한다. 증권거래세는 0.25%에서 단계적으로 0.1%포인트 인하한다는 방침이지만 개미들은 “거래세를 쥐꼬리만큼 감면해주면서 투자에 따른 이익금은 대폭 가져가겠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은택 KB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세제 개편으로 해외 주식 직구 매력도가 높아지면서 기존 개미는 물론 주식 투자를 하지 않던 사람들도 해외 주식 투자에 더 관심을 가질 것”으로 내다봤다.

수수료 장사를 하는 증권사들로서는 이런 열풍이 반갑다. 박혜진 대신증권 연구원은 “해외 주식 거래 수수료율이 국내 주식보다 높아 증권사 입장에선 나쁠 게 없다”며 “미래에셋대우 등 이용자의 해외 주식 거래 비중이 큰 증권사일수록 득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증권사들은 해외 주식 직구 관련 서비스 강화에 나섰다. 삼성증권은 해외 주식 투자 정보를 유튜브 영상 등으로 제공 중이다. 키움증권은 미국 주식을 첫 거래하는 소비자에게 40달러씩 지급하는 한편, 9월까지 환율을 우대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국내 시장의 투자동력 감소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정부와 금융 당국이 곱씹어볼 문제라는 우려도 나온다. 익명을 원한 시중은행의 한 PB(프라이빗뱅커)는 “상장기업은 시장에서 투자한 자금을 동력 삼아 미래 먹거리 발굴에 투자하거나 살림살이를 꾸려나간다”며 “국내 주식 투자 매력도가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두언 KB증권 연구원도 “1980년대 일본에서처럼 투자자들이 국내 기업의 성장성 한계를 실감하고 대체 수단으로 해외 기업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줄잇는 대어급 공모주…빚 내서 ‘묻지마 청약’도

최근 개미 투자자들에게 해외 주식 투자만큼 인기를 모으는 투자처가 또 있다. 기업공개(IPO)로 국내 증시에 상장되는 공모주다. 특히 대어급 공모주는 공모가 대비 주가가 크게 오를 것으로 기대돼 빚까지 내서 투자하는 ‘묻지마 청약’마저 유행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SK그룹 계열 바이오 기업 SK바이오팜은 코스피에 상장한 지난 2일 첫날 공모가(4만9000원)의 200% 금액에 시초가를 형성한 후 바로 상한가를 기록했다. 이후 6일까지 3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이어갔다. 이에 2차전지 장비제조기업 에이프로는 8~9일 코스닥 상장을 위한 공모 청약에서 1282.5대 1 경쟁률을 기록했다.

하반기 다른 공모주 ‘잭팟’을 노리는 개인 투자자들의 발걸음도 더 빨라질 전망이다. 기대를 모은 대표적인 대어급 공모주로 빅히트엔터테인먼트와 카카오게임즈가 있다. 월드스타 BTS(방탄소년단)가 소속된 연예기획사 빅히트는 지난해 매출 5872억원, 영업이익 987억원을 기록했다. 빅히트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국내 3대 연예기획사인 에스엠(404억원)·JYP(435억원)·와이지엔터테인먼트(20억원)의 영업이익 총합보다 많은 수치다. 빅히트는 지난 5월 말 거래소에 유가증권시장 예비심사신청서를 제출, 본격 상장 절차에 들어갔다. 올 하반기 상장이 유력하다.

지난 달 거래소에 코스닥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한 카카오게임즈도 주목된다. 최근 주가가 연일 고공행진하고 있는 카카오의 계열사 중 처음으로 IPO에 뛰어들었다. 카카오게임즈는 인기 PC 게임 ‘배틀그라운드’와 모바일 게임 ‘달빛조각사’ 등을 서비스해 게이머 사이에 인지도가 높다. 증권 업계는 카카오게임즈가 상장하면 시가총액이 최대 2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기대 속에 공모주 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공모주 펀드도 인기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3일 기준 국내에 설정된 110개 공모주 펀드엔 한 달 동안 6794억원이 순유입됐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저금리로 마땅한 투자처를 잃은 자금이 단기간 고수익 기대감에 공모주로 쏠리는 추세가 당분간 이어질 확률이 높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선 신중한 접근도 주문하고 있다. 익명을 원한 증권사 연구원은 “공모주는 상장 후 주가 변동성이 커서 기업가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묻지마 청약은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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