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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혜수의 카운터어택

‘준호 아빠’가 잘못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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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혜수 스포츠팀장

(※이 칼럼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넷플릭스 검색창에 ‘4등’이라고 쳤다. 영화가 시작했다. 박세리의 1998년 US여자오픈 골프대회 우승 장면이다. 맨발 투혼에 대한 시민들 찬사가 이어진다.

장면이 바뀐다. 한 포장마차다. 신문사 체육부 기자 김영훈이 지인과 술을 마시고 있다. 까까머리 청년이 들어선다. 수영 국가대표 김광수다. 두 사람은 통성명 뒤 술잔을 주고받는다. 김광수는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다. 동시에 자신감이 지나치다. 술, 도박 등에 한눈을 판다. 국가대표 소집훈련에 지각 입소한다. 화가 난 감독은 김광수를 때린다. 얻어맞던 김광수는 도망친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감독의 폭행 사실을 기사화해 달라고 사정한다. 분노로 불타는 김광수 눈빛. 화면은 암전된다.

영화에서 코치가 준호를 체벌하는 장면. [사진 영화사]

영화에서 코치가 준호를 체벌하는 장면. [사진 영화사]

시간이 바뀐다. 16년이 흘렀다. 초등학생 수영선수 김준호는 대회만 나가면 늘 4등이다. 애가 탄 준호 엄마는 ‘용하다’는 코치에게 아들을 맡긴다. 코치는 체벌을 통해 가르친다. 준호는 메달을 딴다. 아빠는 메달이 체벌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준호 아빠는 김영훈, 코치는 김광수다. 그 길로 김광수를 찾아간 김영훈은 “준호를 또 때리면 ‘때렸다’는 기사를 보게 될 거고, 다시는 물밥 못 먹게(수영 관련 일을 못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런데도 또 때린다. 이번엔 수영장 직원이 체벌을 목격한다. 김광수는 코치직을 잃는다. 해고 통보 자리에서 김광수는 절규한다. “내가 두드려 맞아서 (김영훈 기자한테) ‘기사 좀 써달라’고 했을 때 그 인간이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린 거 아니냐’ 그랬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소속 최숙현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코치와 팀 닥터, 선배들의 오랜 폭력에 버티다가 결국 무너졌다. 고인은 올해 4월부터 대한체육회, 국가인권위원회, 대한철인3종협회, 경주시, 경찰 등에 지속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의 극단적 선택을 막을, 실질적 도움이 된 기관은 결과적으로 없었다. 언론은 도움을 요청할 후보에도 들지 못했다. 세상이 온통 김광수를 외면했던 김영훈 기자였던 셈이다.

영화에서 준호는 김광수에게 “때리지도 않고 맞지도 않고 메달을 따야 진짜 잘하는 거고, 과정이 중요하다. 아빠가 그렇게 얘기했다”고 말한다. 옳은 소리다. 하지만 준호 아빠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폭력 상황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상황에 대처하는 게 우선이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에, 영화에서는 폭력이 대물림됐고, 현실에서는 한 생명이 떠났다. 준호 아빠가 잘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준호 아빠였다.

장혜수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