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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격인가, 사고인가…핵 시설 타격받은 이란의 수상한 번복

중앙일보

입력

지난 2일(현지시간) 이란 중부 나탄즈의 핵시설 단지에서 발생한 화재가 반(反)이란 세력에 의한 사보타주(고위적 파괴 행위)였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란이 최초 입장을 번복해 핵물질 제조 관련 시설에 타격이 있었다는 점을 시인하면서다.

 이란원자력청이 지난 2일 공개한 불이 난 나탄즈 핵시설. [AP=연합뉴스]

이란원자력청이 지난 2일 공개한 불이 난 나탄즈 핵시설. [AP=연합뉴스]

베흐루즈 카말반디 이란 원자력청 대변인은 5일(현지시간) 이란 국영 IRNA 통신과 인터뷰에서 “신형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가 생산되는 건물에서 불이 났다”며 “원심분리기 개발·생산이 중장기적으로 늦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화재로 나탄즈의 우라늄 농축을 위한 주요 시설에는 지장이 없다”면서도 “더 크고 첨단화된 설비를 갖춘 원심분리기 생산시설을 재건축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고 덧붙였다.

사보타주 의혹이 커진 데는 이란의 말 바꾸기가 결정적이었다. 카말반디 대변인은 화재 당시 “야외에 있는 건축 중인 창고에서 불이 났다”며 “나탄즈 주요 핵시설에서 이뤄지는 활동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밝혔다. 뭔가를 숨기려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어쩔 수 없이 태도를 바꾼 것 아니냐는 의미다.

그는 당시의 입장을 번복하는 자리에서 “안보 관련 기관이 화재의 원인을 알아냈지만, 국가 안보와 관련된 문제라 그들이 외부로 공개되기 원치 않는다”고 설명했다.

나탄즈 핵시설 피해를 보여주는 플래닛랩스의 위성 사진. [AP=연합뉴스]

나탄즈 핵시설 피해를 보여주는 플래닛랩스의 위성 사진. [AP=연합뉴스]

실제 사보타주 의혹은 화재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미 뉴욕타임스(NYT)와 AP통신은 이란 원자력청(AEOI)이 공개한 현장 사진과 동영상, 익명의 소식통 등을 통해 단순 화재가 아닌 폭발이라는 데 무게를 뒀다.

2010년 컴퓨터 바이러스 '스턱스넷'의 공격을 받아 나탄즈 시설의 원심분리기 일부가 수개월간 멈춘 이력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었다. 당시 이 공격의 배후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이 지목됐다.

나탄즈 단지가 미국, 이스라엘 등을 의식한 핵 경쟁의 산물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란의 적성국에 ‘파괴할 가치’가 있는 핵시설이라는 것이다. 실제 카말반디 대변인은 5일 “불이 난 건물은 미국이 2018년 5월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탈퇴한 이틀 뒤 최고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건설됐다”고 말했다.

이란 역시 지난 1월 JCPOA에서 정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동결·제한 규정을 더는 지키지 않겠다며 핵 합의 탈퇴 의사를 기정사실화한 바 있다. JCPOA는 주요 6개국(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독일)과 이란이 2015년 7월 타결한 합의로,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의 수량과 성능을 제한하는 게 골자다.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데 제약을 두기 위해서다.

이란 나탄즈 우라늄 농축시설의 원심분리기. [이란 원자력청=연합뉴스]

이란 나탄즈 우라늄 농축시설의 원심분리기. [이란 원자력청=연합뉴스]

악화일로에 빠진 대(對)이란 정세 역시 의도적 피격 가능성을 높인다. 지난 1월 이란 군부 실세인 거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 미군에 의해 숨진 뒤 이란 전역에는 긴장감이 팽배하다. 지난달 26일에는 핵시설로 의심되는 이란 북부 파르친 군기지 부근에서 가스탱크에 불이 나는가 하면, 같은 달 30일에는 테헤란 북부 시나 아타르 보건소에서 최소 19명의 사망자를 낸 폭발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이번 나탄즈 화재 사건과의 연관성에 선을 긋고 있다. 베니 간츠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이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우리와 반드시 연관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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