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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도 한전 정규직 되려면, 월180만원 인턴 넉달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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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인천공항 노조의 25일 청와대 인근 기자회견. 뉴스1

인천공항 노조의 25일 청와대 인근 기자회견. 뉴스1

 공공기관 중 비정규직을 가장 많이 정규직으로 전환한 한국전력공사가 변호사 등 전문인력을 ‘채용형 인턴’으로 선발한다는 공고를 냈다. 올 하반기 8개 직무의 전문인력을 인턴으로 선발해 ‘월 180만원·4개월 인턴 기간’을 거친 후 적격자에 한해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정규직 전환 논란 속에서 이런 한전의 정규직 채용 방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전, 채용형 인턴 변호사 첫 선발 #숙소 제공 않고 지방 근무 조건 #전문가 “비정규직 지나친 정규직화 #신규채용 정규직 문턱 점점 높아져”

변호사도 월 180만원 인턴 후 정규직 전환

한국전력 2020년도 4직급 전문인력 채용공고문. 한국전력

한국전력 2020년도 4직급 전문인력 채용공고문. 한국전력

공고에 따르면 다음 달 2일부터 한전은 ‘2020년도 4직급 전문인력’ 채용에 들어간다. 산업안전·구매계약·소프트웨어 개발 등 8개 직무에서 총 16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특히 변호사 자격증, 석사 학위 소지자, 경력 3년 이상 등이 필수인 전문인력을 채용형 인턴 방식으로 선발한다고 밝혔다. 한전이 변호사를 직원으로 채용하면서 인턴 기간을 거친 후 정규직 전환 여부를 결정하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인턴 근무 기간은 4개월이며 급여 수준은 월 180만원이다. 근무지는 전라남도 나주에 위치한 한국전력 본사다. 공고문에는 “인턴 근무 기간 중 숙소 미제공”이 명시돼있다.

변호사를 포함해 모든 직렬은 예외 없이 4차에 걸친 전형절차를 모두 통과해야 인턴으로 선발될 수 있다. '서류심사→직무능력검사&인성검사→종합면접→신체검사'를 거쳐야 한다. 2차부터 5~7배수를 선발하며 최종 합격 시 8월 24일부터 인턴으로 근무를 시작한다. 한국전력은 “인턴근무 평가 후 적격자에 한해 정규직으로 전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채용공고에는 정규직 전환 이후 ‘부서 배치 후 5년간 의무근무’ 조건도 달렸다.

공기업 중 정규직 전환 규모 1위

앞서 한전은 최근 3년여간 비정규직과 하도급 직원 8200여명을 자회사 소속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363개의 공공기관 중 정규직 전환 인원이 가장 많다. 2016년에는 정규직 전환자가 없다가 2017년 234명을 전환한 데 이어 지난해 5688명이 한꺼번에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올해 1분기에도 2315명이 정규직이 됐다.

이러한 한전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싸고 내부에서는 “정규직 전환 대상자가 많아지며 인건비 부담이 커졌는지 각종 수당이 줄어들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한전은 정규직 전환 등에 따른 인건비 부담이 전년 대비 4976억원 증가했다. 한전은 지난해 1조3500억원에 달하는 적자를 내면서 11년 만에 최악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점점 높아지는 정규직 문턱

전문가들은 신입채용의 문턱이 높아지면서 급기야 이러한 채용조건까지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18년 1780명이었던 한전의 정규직 신규채용 규모는 올해 1600명으로 줄어들 예정이다. 권영준 한국뉴욕주립대 경영학과 석좌교수는 “노동시장에서 고용정책은 숲과 나무를 다 봐야 하는데 현재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나무만 보고 있다”며 “그 결과 신규채용의 정규직 문턱은 점점 높아지고 비정규직은 필요 이상으로 정규직이 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노동시장 정책에서 공정도 중요하지만 기업의 목표인 이윤극대화라는 시장가치를 살릴 수 있는 균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전 관계자는 “채용형 인턴은 이미 공공기관의 일반화된 채용 방식”이라며 “전문인력이라 하더라도 인턴십 기간에 직무역량과 회사의 기여도 등을 적합하게 평가하고자 채용형 인턴 방식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이어 “인턴십 기간 평가나 경쟁 등을 통해 일부러 탈락시키는 방식이 아니다”며 “큰 문제가 없다면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밝혔다.

“공기업 입사 어려운 현실 보여줘”

취업준비생들은 이러한 채용공고가 공기업 정규직 입사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했다. 올해 상반기 한전 대졸 신입 공개채용 시험에 응시한 취업준비생 김모씨는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마저 공기업에서 정규직이 되기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며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을 비롯해 여러 공기업에서 수천 명의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사례를 접할 때마다 취준생으로서 박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전은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실시한 ‘2020 대학생이 꼽은 가장 일하고 싶은 공기업’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인천국제공항공사 다음으로 2위를 기록했다.

한편 한전의 채용형 인턴 선발 방식에 대해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의 한 신입변호사는 “로스쿨 졸업 후 서초동의 막내 변호사로 들어가도 수습 기간에 월 200만원 이상은 받는다”며 “정규직도 아닌 상황에서 지방에서 4개월간 180만원 받으며 일할 변호사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는 “통상적인 수습 변호사 채용 조건에 비해 처우가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며 “이러한 최저임금 수준의 열정페이 문제에 대해 상황 파악 후 문제를 공론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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