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벽화’ 대접받는 영국 벽지 브랜드, 조선 책거리에 꽂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영국 벽지 브랜드 드고네이와 공간 기획자 양태오가 협업해 한국 컬렉션을 냈다. 궁궐도의 모습. [사진 태오양 스튜디오]

영국 벽지 브랜드 드고네이와 공간 기획자 양태오가 협업해 한국 컬렉션을 냈다. 궁궐도의 모습. [사진 태오양 스튜디오]

“드고네이와 협업을 진행한다는 게 꿈만 같았죠.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에게는 동경의 브랜드니까요.”

한땀한땀 수작업, 왕실·호텔 애용 #방 1개 도배 5000만원, 이사 때 떼가 #코리아 컬렉션 협업한 양태오씨 #“궁궐도 등 한국 전통미 통했죠”

한국적 미감을 동력으로 현대적 공간을 만들어온 디자이너 양태오의 말이다. 최근 그는 뜻밖에도 벽지 작업을 했다.

이를 제안한 드고네이는 고가의 핸드 페인팅 벽지를 만드는 영국 회사다. 주문 제작 방식으로, 실크나 종이 위에 장인들이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손으로 그려 고객의 집으로 배송한다. 공간에 공을 들이는 유명 호텔이나 격조 높은 레스토랑, 영국 왕실 및 유명인들이 애용한다. 방 하나를 이런 벽지로 꾸미는데 우리 돈 5000만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그러니 이사할 때 떼어가는 벽지, 실은 벽지보다 벽화에 가까운 예술품인 셈이다.

지난 25일 종로구 계동 양 디자이너의 한옥집에서 인터뷰했다. 변선구 기자

지난 25일 종로구 계동 양 디자이너의 한옥집에서 인터뷰했다. 변선구 기자

“지금까지 드고네이에는 한국 컬렉션이 없었어요. 대신 중국이나 일본의 전통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제품들이 많았죠. 서양인들이 보기에 중국·일본의 그림과 한국의 그림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양태오의 설명이다.

1986년 설립된 드고네이의 주요 품목은 시누아즈리(chinoiserie), 즉 17세기 유럽 상류층 사이 유행했던 중국풍 벽지다. 소나무, 학, 매화 등을 주제로 한 컬렉션도 있지만, 미묘하게 일본이나 중국의 색이 묻어난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드고네이를 주문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드고네이가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담은 새로운 컬렉션을 작업하기 위한 디자이너로 양태오를 낙점한 것이다.

주문이 들어오면 수작업으로 그림을 그려 제작하는 드고네이 벽지. 금을 활용해 반짝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진 드고네이 홈페이지]

주문이 들어오면 수작업으로 그림을 그려 제작하는 드고네이 벽지. 금을 활용해 반짝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진 드고네이 홈페이지]

양태오는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뒤 세계적 디자이너 마르셀 반더스 밑에서 일했다. 현재 서울 북촌에서 ‘태오양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롯데월드타워 123층 루프탑 라운지, 중국 베이징 한국문화원 VIP 접견실, 망향휴게소 화장실 리노베이션 등 그의 굵직한 작업들은 모두 한국적 미감을 살린 현대적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얼마 전에는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 리뉴얼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드고네이의 제안을 받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고 고백했다. 한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에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 대중들의 시선도 겁이 났다. 고민 끝에 평소 가장 좋아했던 한국의 전통화를 떠올렸다. 바로 책거리와 궁궐도다. “책이 있는 풍경을 그린 책거리는 한국적 정물화의 대표 격이죠. 배움이나 지식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멋있는 그림이기도 하고요. 마침 드고네이 창립자인 클라우드 고네이가 1987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책거리(책가도)를 구매해 소장하고 있었어요. 한국 컬렉션으로 책거리를 제안했을 때 그 아름다움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죠.”

조선시대 책거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사진 태오양 스튜디오]

조선시대 책거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사진 태오양 스튜디오]

궁궐도는 궁궐의 모습을 세세하게 기록한 그림이다. 주로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선으로 궁궐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는 방식이 많다. 양태오 디자이너는 전통 궁궐도와 달리 정면에서 바라본 궁궐의 일부 모습을 그려냈다. 그 앞에는 ‘화계’를 더했다. ‘꽃을 위한 계단’이라는 의미로 조선 시대 왕실 여성들의 공간에 꾸며진 계단식 정원을 의미한다. 여기에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장수를 상징하는 나비, 재물복을 나타내는 개구리를 그려 넣었다. “개구리와 나비, 모란이 상징하는 바를 얘기해주니 드고네이 관계자들이 너무 놀라면서도 좋아하더라고요. 그림에 그런 재미있는 상징을 담았던 조선 시대 사람들의 재치에 감탄하는 눈치였어요.”

책거리 역시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검은색 배경에 녹색의 책과 현대적인 형태의 촛대, 괴석을 그렸다. 괴석 한쪽 면에는 거울을 달아 맞은편의 책과 소품이 비치도록 표현했다. 늘 거울을 보듯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아 수양하는 선비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름하여 ‘배움의 즐거움(Art of Learning)’이다

이 책거리는 지난 1월 드고네이의 프랑스 파리 쇼룸에 전시됐다. 쇼룸이 자리한 곳은 생제르망 데 프레, 파리의 디자인 거리로도 불리는 지역이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책을 주요 주제로 한 그림의 형식이 있다는 것 자체를 놀라워했어요. 그림의 뜻을 이해한 뒤에는 조선을 수준 높은 정신문화를 가진 나라로 인정했죠.” 전통화지만 무작정 전통만을 좇지는 않았다. 전통의 지킴이가 아니라,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나아가 미래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그의 디자인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가 사는 서울 계동의 아름다운 한옥에는 이우환 작가의 그림부터 가야 토기까지 놀랄만한 미술품이 많다. 그 사이에 드고네이의 한국 컬렉션 두 점도 자리했다. 양 디자이너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