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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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이 대지를 장악하고 개나리와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이 시절, 밤 공기를 타고 새소리 창공을 가르고 있다.

오늘 하루, 병원 생활을 하면서 마주치는 숱한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들 인생에서 만남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지 생각해 본다.

돌이켜 보면 서른 세 해를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이들을 만났고, 많고 적은 시간들을 공유하였지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것은 많지 않은 느낌이다.

누구나 한번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만큼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주어진 시간에 따라 사람들은 너무 오래 살았느니 너무 빨리 죽었느니 하면서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고 평가를 받는다.

그 동안 저는 호스피스 의사로서 병원이나 가정 방문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임종 과정을 보았다. 제가 본 환자들은 그들의 임종시간보다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과 가족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어 진다.

꽃은 피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지고 나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이란 과정을 통해 인생을 재조명하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어 가족들이 어려운 순간에 봉착할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을 남기고 떠난다.

이것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일 지 모른다. 그 동안 제가 만나 치료하고 임종의 순간을 함께 하였던 분들에 대해서 이 자리를 통해 이야기해 보겠다.

그들이 정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지 각자 판단하시기 바라며 만약 여러분이나 주위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닥쳤을 때 저의 이 글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된다면 진심으로 기쁜 마음을 가지고 보람을 느낄 것이다.

제가 처음 임종 환자를 보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가 복지 병원에서 만났던 피부암 환자다. 그 분은 저에게 호스피스란 말과 의미를 몸으로써 알려주었고, 저를 그 길로 인도하셨다.

의사국가 고시를 마치고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인턴으로 들어가기 전 2개월 동안 저는 미아 삼거리에 있는 성가복지병원(무료병원)에서 의사로서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성가복지병원은 8층 건물의 무료병원으로 입원환자만 200명이나 된다. 봉직 의사 선생님은 2분 계셨고, 십 여명의 의사 선생님들이 주말을 이용하여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특히 병원 5층은 호스피스 병동으로 주로 말기 암 환자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호스피스라는 것이 임종환자들 간호나 기도만 해주는 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환자를 보면서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단순한 간호나 손을 잡고 기도를 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처음 1개월 동안은 학생이 아닌 의사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려니 재미도 있었지만 아직은 예비 의사라는 사실 때문에 환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많이 들었다.

2개월 째부터는 어느 정도 자신감도 붙어서 일하기가 훨씬 수월하였고 기쁨도 두 배나 되었다. 2개월의 시간 동안 나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게 사람이 있었다.

그는 57세 남자 환자로, 직업은 노동이며,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현재는 피부암 말기로 통증이 가장 심하였다. 복도 맨 끝인 507호로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그의 침대가 위치한다.

회진할 때나 다른 용무로 그 병실을 들어갈 때면 항상 누어서 소리는 내지 않지만 고통을 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암 자체가 전신에 퍼져있는 상태라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운 상태로 있으며, 거동이 불가능하여 어디 움직이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침대 생활만 하셨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오면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말은 하지를 않는다. 나머지 시간은 통증과 싸우는 데 허비한다.

하루는 주사용 진통제를 맞고 나서 그가 저에게 말을 걸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죠? "

"절대 아닙니다. 다만 통증이 심한 당신에게 의사로서 저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하고 단순히 진통제만 주는 의사로서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안 그래요. 선생님은 훌륭한 의사이며, 앞으로 더 훌륭한 의사로서 성장할 것입니다. 제가 비록 배운 것 없고 이렇게 몸에 병까지 걸려 여러 사람에게 신세만 지니 미안할 다름입니다. 그 동안 저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되네요. 다만 정말로 저에게 행운은 이런 훌륭한 병원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손길을 통해 임종할 수 있다니 기쁩니다."


다시 몰려오는 통증으로 인해 더 이상 대화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을 참고 있는 그의 손을 잡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는 암이 진행되어 의식에 변화가 왔고, 호흡도 거칠어져 임종 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 눈을 감은 채 차디찬 지하 영안실로 옮겨졌다.

결국 그는 통증 속에서 시달리면서 임종을 하였고, 죽은 후에야 비로소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제가 그와 함께 했던 시간 동안 저는 의사로서 그를 위해 한 일이라곤 진통제 주사를 몇 번 준 것밖에는 없었다. 그것도 충분한 용량을 주지는 못했다.

성가 복지 병원에서의 2개월간의 짧은 시간을 마친 후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았다. 병원 생활 동안 머리 속에서 그 환자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슈바이쪄 박사가 21세 때 본 슬픈 흑인 동상의 기억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나중에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간 것처럼 그 환자의 기억은 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고, 앞으로 보낼 의사 생활에서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주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역시 자기의 여건과 처지에서 가장 합리적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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