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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댓]"곱슬에 온몸 검다"…임진왜란 당시 '흑인 용병'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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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1598년 5월 정유재란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팽유격이 선조를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팽유격은 ‘얼굴 모습이 다른 신병(神兵)이 있다’며 함께 온 병사를 소개합니다. 팽유격이 소개한 병사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용병이었습니다. 흑인 용병이 어떻게 멀고 먼 조선의 전쟁터까지 왔을까요.

“머리카락은 양털처럼 짧고 곱슬인데, 온몸이 모두 검다.”

흑인 병사를 본 선조와 사관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명은 해귀(海鬼)이다.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머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이마는 대머리가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른 비단을 반도(磻桃)의 형상처럼 서려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賊船)을 공격할 수가 있고 또 수일 동안 물속에 있으면서 수족(水族)을 잡아먹을 줄 안다. 중원 사람도 보기가 쉽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5월 26일)

 풍산김씨 오미동파가 보유한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錢別圖)'. 여기서 '천조'는 명나라를 가리킨다. [자료 한국국학진흥원]

풍산김씨 오미동파가 보유한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錢別圖)'. 여기서 '천조'는 명나라를 가리킨다. [자료 한국국학진흥원]

'천조장사전별도'에서 흑인으로 추정되는 병사 부분을 확대한 모습 [자료 한국국학진흥원]

'천조장사전별도'에서 흑인으로 추정되는 병사 부분을 확대한 모습 [자료 한국국학진흥원]

선조가 “어느 지방 사람이며 무슨 기술을 가졌소이까?”라고 묻자 팽유격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호광(湖廣)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입니다. 바다 셋을 건너야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여 리나 됩니다. 그 사람은 조총(鳥銃)을 잘 쏘고 여러 가지 무예(武藝)를 지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대단히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선조는 팽유격에게 “소방(조선)은 치우치게 해외(海外)에 있으니 어떻게 이런 신병을 보았겠소이까. 지금 대인의 덕택으로 보게 되었으니 황은(皇恩)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제 흉적(일본군)을 섬멸하는 것은 날을 꼽아 기대할 수 있겠소이다.”

미국보다 많았던 이슬람의 흑인 노예

이슬람 상인에 의해 팔려가는 흑인 노예 그림 [ 자료 apya.org]

이슬람 상인에 의해 팔려가는 흑인 노예 그림 [ 자료 apya.org]

그렇다면 이 흑인은 어디서 왔을까요. 팽유격이 말한 ‘파랑국’은 포르투갈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포르투갈이 아닌 마카오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마카오는 당시 무역에 종사하는 프로투갈인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고용한 흑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흑인 노예라고 하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것처럼 미국 남부의 넓은 목화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흑인 노예의 역사는 이보다 한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가 팔려가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①북쪽(지중해) 루트: 사하라 사막을 건너 북쪽 아프리카 및 오스만투르크
②동쪽(인도양) 루트: 인도양과 홍해를 넘어 아라비아 반도, 이란, 인도 등
③서쪽(대서양) 루트: 대서양을 건너 중남미 국가 및 미국 등지

이슬람 세력이 동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강제로 납치해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 [자료 slaveryimages.org]

이슬람 세력이 동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강제로 납치해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 [자료 slaveryimages.org]

미국에 끌려간 노예 못지않게 이슬람 국가 등에 팔린 노예 숫자가 더 많았습니다. 그것은 이슬람의 노예무역 역사가 오래됐기 때문입니다. 이미 7세기부터 이슬람 상인들이 주도해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와 오스만 투르크 등에 흑인 노예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노예 무역의 권위자인 미국 역사학자 필립 커틴에 따르면 19세기까지 약 950만명의 흑인 노예들이 이 경로를 통해 팔려갔다고 합니다.
또 15~19세기 홍해나 인도양을 통해 아라비아 반도, 서남아시아의 이슬람 국가, 또는 인도 등으로 약 500만명의 노예가 보내졌습니다.

아프리카 노예시장의 동쪽 루트. 인도양을 넘어 아라비아 반도나 인도 등지로 팔려나간 노예는 약 500만명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료 Atlas of the Transatlantic Slave Trade]

아프리카 노예시장의 동쪽 루트. 인도양을 넘어 아라비아 반도나 인도 등지로 팔려나간 노예는 약 500만명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료 Atlas of the Transatlantic Slave Trade]

그런데 당시 인도에는 고아(Goa) 등 포르투갈이 지배하는 상업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또, 인도에 오는 흑인들은 상당수가 군인으로 충원됐습니다. 이들을 합쉬(Habshi)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에 왔던 흑인 병사도 동아프리카에서 인도, 마카오를 거쳐 명나라 군대에 채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세 번째 루트로 19세기 노예무역이 금지될 때까지 이동했습니다. 950만명 중 미국 등 북미 지역으로 간 흑인은 50~60만명 정도였고, 브라질에는 약 380~500만명이 팔려갔습니다.

미국 노예의 시작은 흑인 아닌 영국인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간 노예 경로 [자료 Statista.com]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간 노예 경로 [자료 Statista.com]

미국보다 브라질에 흑인 노예가 많이 팔려간 것은 이곳에서 16세기부터 사탕수수 농장을 대규모로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이보다 늦은 18세기부터 면화ㆍ담배 농장이 본격화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초창기 미국에선 흑인보다는 영국에서 온 하층민들이 ‘계약직 노예’로 일했습니다. 일정 기간 일하면 자립할 수 있는 토지 등을 마련해 해주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1656년만 해도 미국에는 약 1만2000명에 달하는 영국인 노예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자산을 가진 흑인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남북전쟁 때의 모습과는 다른 풍경이었죠.

영화 '노예 12년' [사진 판시네마]

영화 '노예 12년' [사진 판시네마]

하지만 영국에서 온 '노예'들은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했고, 미국 노예주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영국에서 미국으로 오려는 희망자는 급감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미국 남부에서 플렌테이션 농업이 확산하면서 결국 아프리카 흑인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흑인 노예들이 미국에 뿌리를 내렸고, 이는 미국의 흑백갈등의 씨앗이 됐습니다.
흑인의 노동력은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북전쟁으로 해방이 됐어도 흑인들은 돈이 없어 제대로 된 교육이나 사업의 기회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열악한 사회적 계급이 대물림되는 구조였던 것이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틸. [사진 수도영화사]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틸. [사진 수도영화사]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계기로 미국 전역으로 번진 시위에서 콜럼버스의 동상이 끌어내려지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불똥이 튄 것은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따라서 흑백갈등을 해소하려면 흑인과 백인 사이의 정치 사회 경제적 격차를 줄여야 하고, 이를 위해선 과거 부당하게 착취당한 흑인에 대해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고, 실행에 따르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실현될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흑백갈등은 역사가 남긴 풀기 힘든 숙제인 셈입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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