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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동아시아의 세계전도, 서양의 침략을 근심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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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9세기 중국·한국서 만든 세계지리지

코로나19 세계지도가 있다. 매일 전 세계의 코로나 현황을 알려준다. 14일자 기준으로 아시아 한·중·일 세 나라의 확진자 수는 11만 명이 넘는다. 유럽의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다섯 나라의 확진자 수는 115만 명이 넘는다. 미국과 브라질의 확진자 수는 각각 207만 명과 85만 명이 넘는다. 대륙에만 퍼진 게 아니다. 태평양·인도양·대서양의 작은 섬나라에도 두루 미쳤다. 세계지도로 재앙을 한눈에 보니 팬데믹을 실감한다.

아편전쟁 직후 나온 『해국도지』 #세계지리·무기지식 100권에 담아 #조선 후기 윤종의의 『벽위신편』 #영해 지키려는 방대한 정보 모아

아편전쟁 직후 중국에서 편찬한 지리책 『해국도지』에 실린 세계지도의 동반구 부분. [사진 노관범]

아편전쟁 직후 중국에서 편찬한 지리책 『해국도지』에 실린 세계지도의 동반구 부분. [사진 노관범]

재앙을 만나면 새로운 세계지도가 나오는 것일까. 『해국도지』(海國圖志)의 세계지도도 그렇게 볼 수 있다. 다만 재앙의 내용이 역병이 아니라 전쟁이다. 세칭 아편전쟁은 영국이 중국에 대한 무역수지를 개선하고자 인도의 아편을 중국에 밀매하고 이를 중국이 제지하자 감행한 부끄러운 전쟁이었다. 청나라 학자 위원(魏源·1794~1856)은 이 사건이 중국의 재앙임을 통감하고 서양을 막아내기 위한 지식의 집적에 매달렸다. 세계지리와 전쟁무기 지식을 겸비한 책  『해국도지』가 그렇게 해서 나왔다.

『해국도지』는 신속히 완성됐다. 임칙서(林則徐)가 지은 ‘사주지’(四州志)를 참조한 결과였다. 임칙서는 전쟁 직전 영국 상선에 가득한 아편 상자를 몰수해서 불살랐던 강경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해국도지』라는 기념비적인 저작의 바탕을 만든 사람이었다. 이 책은 계속 증보됐다. 50권(1844), 60권(1847), 100권(1852)으로 늘어났다.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그 해(1876)에도, 청일전쟁이 종결된 그 해(1895)에도 계속 나왔다.

조선 지도에 명기된 ‘동해’ 흥미로워

청일전쟁 이후 제작한 『태서신사남요』의 세계전도.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 분할을 표기했으며, 조선에서도 사용했다. [사진 노관범]

청일전쟁 이후 제작한 『태서신사남요』의 세계전도.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 분할을 표기했으며, 조선에서도 사용했다. [사진 노관범]

『해국도지』 세계지도를 본다. 중국의 동쪽으로 조선·유구·일본이 있고, 일본 너머에 대동양이 있다. 중국의 남쪽으로 대만·여송(필리핀 루손섬)을 지나 적도를 남하하면 대남양이 있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시선을 돌리면 영길리·불란서·대여송(스페인)이 있고 그 너머에 대서양이 있다. 필리핀과 스페인을 여송과 대여송이라 하다니 주객이 전도된 어법이다. 중국을 방문한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가 쓴 『직방외기』(1623)의 ‘만국전도’에 이미 이서파니아(以西把尼亞)와 신(新)이서파니아(멕시코)라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일까.

아시아 지도로 들어간다. 전체 지도에 이어 나오는 첫 번째 지역 지도는 조선국이다. 신기하게도 조선을 셋으로 나눠 북계도(北界圖)·중계도(中界圖)·남계도(南界圖)를 그렸다. 이렇게 자세하게 그린 나라가 드물다. 『해국도지』에서 조선국 지도를 펼쳐 놓고 관악산과 백악산을 찾고 죽령과 조령을 찾고 춘천과 가평을 찾는 지명 찾기 놀이를 해도 좋을 정도다. 조선국 지도에 ‘동해’가 명기돼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일본국 지도는 아시아 지도에서 거의 끝에 있다. 놀라운 것은 여타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산과 강의 지형 표시와 명칭 표기가 전연 없다는 점이다. 단지 주 이름과 섬 이름이 배열돼 있을 뿐이고 드문드문 일본국 임금이 산다거나 금과 은이 난다는 설명이 적혀 있는 정도다. 일본 전국시대에 친숙한 독자라면 월후주(越後州)·갑비주(甲斐州) 등의 이름에서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등의 인물을 떠올릴 수 있겠다.

『해국도지』 세계지도의 조선 북계(北界) 부분. ‘동해’가 명기돼 있다. [사진 노관범]

『해국도지』 세계지도의 조선 북계(北界) 부분. ‘동해’가 명기돼 있다. [사진 노관범]

아시아 지도에 이어 아프리카·유럽·아메리카 지도가 있지만 생략한다. 지도가 끝난 다음엔 지지(地誌)가 이어진다. ‘동남양’ 항목은 월남·섬라(暹羅·태국)·면전(緬甸·미얀마)이 차례차례 나온다. ‘서남양’ 항목은 인도, ‘소서양’ 항목은 아프리카다. ‘대서양’ 항목은 대여송·하란(네덜란드)·불란서가 차례차례 나온다. ‘외대서양’ 항목은 아메리카다. 지도와 지지를 비교하면 지도에는 있으나 지지에는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선이다. 마땅한 항목이 없어서였을까.

이 문제는 쉽지 않다. 다만 일본도 원래는 조선처럼 지지가 없었는데 증보판을 내면서 ‘동남양’ 항목에 추가됐다. 중국의 해방(海防·외적의 침입을 바다로부터 방어)이라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관한 지식도 요청된 것이다. 동아시아 해역사의 시각에서 명나라 말기 일본의 관련 기록이 수집됐고, 그 안에는 왜구와 왜란도 포함됐다. 일본도 해국이고 임진왜란도 아편전쟁이라는 뜻이었을까.

윤종의의 『벽위신편』

윤종의의 『벽위신편』

『해국도지』 확산을 배경으로 조선에서도 비슷한 책이 출현했다. 박규수의 벗 윤종의(尹宗儀·1805~1886)가 편찬한 『벽위신편』(闢衛新編)은 가히 조선의 『해국도지』라 부를 만한 문헌이었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의 외사촌 이정리(李正履)에게 배운 그는 조선의 척사(斥邪)와 조선의 해방(海防)을 위한 지식의 집적에 필사적이었다. 이 책은 『해국도지』에 없는 중국 연해 상세 지도와 조선 연해 상세 지도 수십 면을 갖췄다. 중국과 조선의 연해에 관심을 집중했다.

청·일전쟁은 중국의 새로운 재앙이었다. 중국과 조선의 바다에서 북양함대가 궤멸됐다. 일본에 패배한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에 포위돼 분할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 무렵 『해국도지』가 저물고 『태서신사남요』(1895)가 떠올랐다. 서양 선교사 이제마태(李提摩太·티모시 리처드)는 이 책을 통해 중국 사회에 서양의 새로운 독법을 일러주고자 했다. 중국은 부강을 원하는가? 서양을 알아라. 서양을 알고 싶은가? 19세기 서양사를 읽어라. 영국의 새 역사에 답이 있다.

유학자 권상규 “원한의 피바다가 됐다”

이 책은 조선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대한제국 학부가 복각한 이 책 안에는 이제마태의 세계지도가 삽입돼 있었다.  『해국도지』의 세계지도와 비교하면 다대한 변화가 있었다. 대동양이 태평양으로, 대여송이 서반아로, 동해가 일본해로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가 있다. 이 지도는 세계 각지에 점선과 실선을 그어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 분할을 표시했다.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미국·네덜란드의 지배를 표시하는 선이었다. 침략과 식민의 섬뜩하고 끔찍한 세계지도였다.

조선 유학자 권상규(權相圭·1874~ 1961)는 『태서신사남요』를 읽고 독후감을 남겼다. “지난날의 이용후생 기술이 성시(城市)와 인민을 도륙하는 기계로 변했고 강력하고 혹독한 폭탄이 거듭된 연구로 갈수록 신기해졌으며 날마다 먼지가 자욱한 전장은 원혼의 피바다가 됐다.” 영국 근대사라는 복음서를 전하고자 했던 이제마태의 의도가 무색하게 제국주의 서양 세력이 세계를 침략하고 문명을 파괴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근대화론에 취해 무한 질주해왔던 20세기에 이러한 성찰이 통할 수 있었을까.

선이 진화하면 악도 진화한다고 했다. 중국 사상가 장빙린(章炳麟·1869~1936)의 유명한 ‘구분진화론’(俱分進化論)이다. 근대에 진화한 ‘악의 세계사’는 제대로 반성된 적이 있었는가. 제국주의·군국주의·식민주의·인종주의는 지금도 활보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코로나 재앙을 만나 옛날 전염병을 찾는 것도 좋지만 이 병든 세계의 진짜 속병을 고쳤으면 좋겠다.

미국은 미리견국, 뉴욕은 신약으로 표기

『해국도지』의 세계지도 중 아메리카 파트.

『해국도지』의 세계지도 중 아메리카 파트.

『해국도지』의 세계지도에는 아메리카 파트(사진)가 있다. ‘미리견국’(彌利堅國)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지도가 나온다. 다른 지도는 미국을 ‘화기국’(花旗國)이라 칭했다. 미국 지도는 미서실비(米西悉比·미시시피) 강줄기를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동부와 서부를 확연히 구별했다.

동부에는 ‘신약’(新約·뉴욕), ‘이리내’(以利乃·일리노이), ‘금돌기’(金突其·켄터키), ‘로의철나’(路義撤拿·루이지애나), ‘미치안’(米治安·미시건) 등 여러 주 이름이 보인다. 미시건은 1837년 미국의 26번째 주가 됐고 미국 지도에 반영된 최신 정보였다. 서부에는 행정 구역 이름이 없이 단지 ‘미소리 땅’(米蘇利地·미주리), ‘아리옹 땅’(阿利翁地·오리건), 그리고 ‘락기’(落機·록키)산맥 왼편에 ‘만족 땅’(蠻族地·원주민 거주지, 시애틀이 있는 워싱턴주)이 적혀 있는 정도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는 미국 지도가 아니라 멕시코 지도에 보인다. 미국은 1845년 텍사스 공화국을 합병하고 1848년에는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양도받았다. 『해국도지』의 미국 지도는 1830년대에서 멈추었다.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 평양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1866),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 강화도에 침입했을 때(1871), 이 낡은 지도는 얼마나 쓸모가 있었을까.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