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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평등경제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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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원배 사회디렉터

김원배 사회디렉터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5년 연두교서에서 소득 불평등에 대한 대책을 제시했다. 부자증세와 최저임금 인상 등이었다.

포용적 성장 위해 혁신성장 필요 #좋은 일자리와 세수 확보 가능 #평등 앞세우면 혁신 동력 위축 #규제 완화로 성장 기틀 마련해야

그런데 여기에 딴지를 건 미국 학자가 있다. 도덕철학자인 해리 프랭크퍼트 프린스턴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2015년 출간한 『평등은 없다』에서 “미국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국민들의 소득이 지나치게 불평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국민 중에 빈곤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라고 썼다. 이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빈곤하게 만듦으로써 소득 평등을 달성한다는 것은 거론할 가치도 없다. 불평등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직면한 문제를 잘못 짚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지속 가능하고 보다 평등한 경제는 제도의 민주주의를 넘어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웠던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포용적 성장에 이어 ‘평등한 경제’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7년 5월 문 대통령의 취임사 중 한 구절이다. 이것과 평등한 경제를 비교하면 차이가 느껴진다. 취임사에선 기회의 평등과 절차적 공정이면 결과와 관계없이 정의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평등한 경제에선 최종 결과의 절대적 차이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 같다.

서소문포럼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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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도 생소하다고 판단했는지 다음 날 따로 설명을 했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평등경제는 정부의 핵심 경제 기조인 포용적 성장과 공정경제의 연장선에 있는 말”이라며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다’는 문 대통령의 국무회의 말씀을 기억해 달라”고 설명했다. 강 대변인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실질적 민주주의를 압축하면 경제민주주의가 도출된다”며 “경제민주주의의 코로나 버전이 평등경제라고 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실현 방법으론 전국민고용보험과 한국판 뉴딜을 거론했다.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우리는 마음껏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지만, 남의 몫을 빼앗을 자유는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지만 남의 부를 빼앗지 않아도 결과는 불평등할 수 있다. 비슷한 규모와 조건의 기업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용인할 수 있는 불평등과 그렇지 않은 불평등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청와대의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평등한 경제는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올 개념이다.

2년 정도의 임기를 남긴 상태에서 새로운 국정 기조를 세우기보다는 기존 목표에 집중하는 게 효율적이다. 포용적 성장이나 공정경제는 대규모 재정 동원과 거대 여당의 입법 지원으로 어느 정도 진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혁신성장은 쉽지 않다. 한 예로 새로운 모빌리티 서비스 타다는 좌초하고 말았다. 최근 타다 서비스에 활용되던 카니발 승합차가 처분됐다. 타다가 4차 산업혁명에 부합하는 서비스냐는 점은 논란이다. 그럼에도 타다 서비스에 만족하던 이용자가 적지 않았다. 기존 산업과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한 채 사업이 중단되도록 한 것은 정부와 정치권의 역량 부족을 드러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마이너스 성장이 예고되는 상황에선 혁신성장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혁신성장이 된다는 것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의미다. 그래야 세금도 잘 걷히고, 이를 기반으로 빈곤층을 지원하는 포용적 성장을 할 수 있다. 계속해서 나랏빚을 늘리며 재정 지출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1일 “민주당은 공정경제와 규제 혁신의 양 날개를 펼치겠다”고 말했다. 입법권을 장악한 거대 여당의 책임이 어느 때보다 크다.

규제 공화국에선 혁신 시도가 좌절된다. 평등한 경제에선 혁신을 할 이유가 없다. 혁신은 자유와 관용의 자식이다. 성장이 가로막힌 상황에서의 평등 추구는 결국 남의 몫을 빼앗는 갈등으로 이어진다.

경제적 민주주의도 재벌개혁에만 함몰돼선 안 된다. 한편으론 민간이 국가 권력과 규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김원배 사회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