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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시각각

백종원과 키다리 아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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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뒤차가 앞차를 들이받는 접촉사고가 난다. 앞차에 탄 40대 아저씨 4명이 일제히 뒷목을 잡고 차 문을 나선다. 뒤차 운전자는 20대 젊은이. 값비싼 고급 차에서 내린 청년이 명함을 들고 “잠시 전화 한 통만 할게요”라고 말하자, 4명이 일제히 ‘나 이런 사람 알아’를 과시하듯 대법원장과 경찰청장과 통화하는 척한다. 기 싸움에 나선 ‘아재’들의 쇼가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밝혀진다. 이 청년의 통화 상대는 보험사 직원임이. 이 뻘쭘하고 멋쩍은 장면 위로 이런 내레이션이 흐른다.

판매난 어려움 겪는 농어민 위해 #인맥 동원한 속전속결 의기투합 #일회성 허세로 비치지 않을까

“사고가 나면 보험회사를 불러야 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우린 20대 때 우리가 그렇게 경멸하던 기성세대의 방식으로 20대를 대하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상식적으로 가면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가고 있고, 허세가 실속처럼 느껴진다면 애석하게도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 경멸했던 기성세대거나 아저씨거나 혹은 꼰대일지 모른다.”(드라마 ‘신사의 품격’(2012) 중)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이 장면은 한국 사회에서 꼰대의 방식인 ‘전화 한 통화’가 시사하는 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고급 차에서 내려 전화기를 드는 순간, 이른바 ‘빽’을 동원해 사태를 무마하려는 신호로 여겨진다. 수많은 사건의 학습 효과로 ‘전화 한 통화’는 인맥과 연줄을 동원해 정당하고 복잡한 절차를 단숨에 건너뛰는 힘의 과시이자 부당함의 총체가 된 것이다.

어떤 측면으로 보면 ‘전화 한 통화’는 효율적이다. 일을 추진할 때 거쳐야 할 행정적·정무적 절차는 얼마나 복잡다단한가. 될 일도 안 되는 경우가 속출한다. 이럴 때 노력으로 쌓아 올린 능력과 경험의 산물인 네트워크를 이용한 질러가기는 삶의 효율적인 노하우로 보일 수 있다.

‘전화 한 통화’의 힘과 효율성을 보여준 것이 오뚜기에서 내놓는 ‘한정판 오동통면’이다. 다시마 2장이 들어간 ‘레어템’으로 수요 부진에 시달리는 전남 완도산 다시마의 소비 진작을 위한 시도다. 이 상품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의 ‘전화 한 통화’ 덕이다.

한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백 대표가 군대 선배인 함영준 오뚜기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2년치 재고인) 다시마 2000t이 남아 있다”며 도움을 청했다. 함 회장이 “다시마 들어간 게 있는데 2장을 넣으면 훨씬 깊은 맛이 나겠다”며 한정판을 출시한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의 등장이다.

백 대표의 원조 ‘키다리 아저씨’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다. 지난해 12월과 지난 4월 백 대표의 요청에 화답해 강원도 못난이 감자 30t과 해남 왕고구마 300t을 사들여 이마트에서 판매했다. 농가를 위한 이들의 의기투합에 ‘선한 소비’를 이끄는 화려한 컬래버라는 칭찬이 이어졌다.

하지만 ‘전화 한 통화’에 뒤이은 이 손쉬움과 신속함을 지켜보며 마음 한편에서는 불편함이 스멀거렸다. 비록 선한 의도일지라도, 모든 절차와 계통을 한 방에 뛰어넘는 인맥과 연줄의 막강함을 확인한 ‘농산물 낙하산’이 마음에 많이 걸려서다(낙하산의 대상이 농산물이 아닌 사람일 때의 아찔함을 떠올려 보라).

대기업 납품을 위해 애쓴 누군가에게 ‘백종원 패스트트랙’은 씁쓸한 자괴감을 불러올 수 있다. 어쩌면 누군가의 기회가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현업의 담당 직원은 갑작스러운 지시에 종종걸음을 쳤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농산물 과잉 생산과 소비 부진으로 인한 수급난은 인맥과 선한 영향력에 기댄 일회성 선행과 착한 소비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전화 한 통화’로 놓은 ‘농산물 오작교’가 건설적 대안을 위한 마중물이 되지 못한다면 그럴싸하게 포장된 허세에 그칠 뿐, 수급 불균형에 논밭을 갈아엎는 안타까운 광경은 되풀이될 것이다. 백종원과 키다리 아저씨의 ‘만능 전화 통화’에 마냥 박수를 보낼 수 없는 이유다.

하현옥 복지행정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