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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벌거벗은 미국을 보고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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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호 20면

신준봉 전문기자의 이번 주 이 책

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미국 인기 작가 니콜 크라우스 #대표작 『사랑의 역사』 등 출간 #최근작 『어두운 숲』 원숙해져 #자아는 환상, 하나의 발명일 뿐

어두운 숲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위대한 집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문학동네

1974년생 소설가 니콜 크라우스. 대표작 『사랑의 역사』로 인기와 평단의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 [사진 문학동네]

1974년생 소설가 니콜 크라우스. 대표작 『사랑의 역사』로 인기와 평단의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 [사진 문학동네]

정부 부처 공무원인 친구가 이런 카톡을 보내왔다. ‘당신이 중년이라는 10가지 징후’. “일상적으로 쓰이는 전자기기들의 작동 방법을 잘 모르게 된다. 젊은이들이 얘기하는 화제에 대해 잘 모른다. 몸이 뻣뻣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오후에 낮잠을 자야 한다. 몸을 굽힐 때 신음소리가 나온다….” 이런 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털이 많아진다.” 기자는 정반대인 것 같아서다. 특정 신체 부위에서 벌어지는 현상이긴 하지만. 마지막 징후에는 과연, 공감했다. “경찰관이나 선생님, 의사가 젊다고 생각한다.”

친구는 자신이 거의 다 해당되는 것 같다고 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면 마음만이라도 말랑말랑 촉촉하게! 그래서 도전했다. 무려 『사랑의 역사』. 장편소설. 미국의 촉망받는, 이제 그도 어느새 중년이니, 실력 있는 중견 작가 니콜 크라우스(46)의 2005년 작이다. 발표 당시에는 촉망받는 풋풋한 작가였겠다.

어두운 숲

어두운 숲

여태 깨우치지 못했던 사랑의 이치를 터득해보겠다는 무모한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역사와 현실. 아니면 섬세한 내면. 여전히 이 양극단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는 것 같은 토종으로부터 좀 벗어나 보자. 그런 생각이었다. 데뷔 이후 줄곧 여성 팬들의 아낌없는 지지를 받아온 소설가 김연수의 다음 추천사가 등을 두드렸다. “사랑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그 역사가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로 표현되는 것은 니콜 크라우스의 노력 덕분이다.”

소설가 조경란의 추천은 더욱 힘이 됐다. “문학의 문학”. 그러니까 ‘문학 오브 문학’? 도저한 작품성으로 소수의 열혈 문학 독자에게만 추앙받는? 조경란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편지가 쓰고 싶어질 것이다. 겨우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다시 쓸 수 없는 사랑의 헌사를.”

책을 펼쳤다. “내 부고가 쓰일 때. 내일. 혹은 그 다음날. 거기에는 이렇게 적힐 것이다. 레오 거스키는 허섭스레기로 가득찬 아파트를 남기고 죽었다.” 첫 문장이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어쩌면 ‘인생파’ 소설이겠구나.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은 이렇다.

“레오폴드 거스키는 1920년 8월 18일에 죽기 시작했다. 걷기를 배우다가 죽었다. 칠판 앞에 서 있다가 죽었다. 그리고 한 번은 무거운 쟁반을 옮기다가 (…).”

물론 1920년 8월 18일은 거스키의 생년월일이다. 우리는 걷기 하나라도 제대로 한다고 자신할 수 있나. 그런 채로 만나 웃고 떠들다 헤어지고 우는 게 우리의 사랑, 우리 인생이겠구나.

소설은 네 화자가 끌고 간다. 평생의 사랑을 잊지 못해 같은 제목의 액자소설 『사랑의 역사』를 쓰는, 물론 거스키. 거스키가 사랑한 여성의 화신 격인 어린 소녀. 거스키에게 열등감을 느껴 문학적 배신을 감행하는 거스키의 친구. 비중은 작지만 소녀와 함께 자칫 우중충할 수 있는 소설에 윤기를 불어넣는(독자에 따라 이 두 아이의 역할이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소녀의 남동생.

이 네 화자가 번갈아 등장해 사랑의 역사를 어지러울 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공정을 거쳐 재구성해내는 게 소설의 얼개다. 그런데 이 재구성이 건조하지 않다. 물론 고비는 있다. 지루한 대목 없는 장편은 없다. 견뎌내고 읽다 보면 머리털이 쭈뼛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기자는 세 차례쯤 경험했다. 재미의 강도를 따지면 『제인 에어』보다 윗길,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과 비슷한 점수를 주고 싶다.

위대한 집

위대한 집

이 슬픈 감동은 어디서 오나. ‘10가지 징후’에 없었던, 중년의 또 다른 징후인 여성 호르몬 과다 분비 때문인가.

소설은 2008년 국내에 첫 출간 됐다 절판됐었다. 2017년 장편 『어두운 숲』 국내 첫 출간에 맞춰 출판사를 바꿔 재출간됐다. 2010년 작 『위대한 집』도 나란히 출간됐다.

유대계인 크라우스는 결핍이 없어 보이는 작가다. 똑똑하고(스탠퍼드 학사, 옥스퍼드 석사) 자신보다 더 ‘잘나가는’ 연하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의 결혼으로 떠들썩했다. 이혼, 정체된 글쓰기의 고통을 딛고 발표한 작품이 『어두운 숲』이다. 재미는 덜하지만 한층 성숙해진 느낌. 전화로 크라우스를 만났다.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그는 아침 조깅을 해야 한다며 기자를 30분 기다리게 했다.

조깅을 하다니. 코로나 괜찮나.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항상 들리다 보니 소리 풍경(soundscape)으로 사태의 다급함을 측정한다. 코로나 쿼런틴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흑인 사망으로 인한) 시위·폭동이 발생하자 이번에는 헬리콥터가 날아다닌다. 하나의 믿을 수 없는 서사가 새로운 서사로 대체되는 상황이다. 환상적이다.”
우리가 알던 미국은 사라진 것 같다.
“여러 상황들이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다. 변화가 불가피하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미국이 애초부터 안고 있는 인종·경제·정치적 문제들을 크게 부각시켰을 뿐이다. 당신은 지금 껍질이 통째로 벗겨진 미국을 보고 있는 거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제들을 통제 어려울 정도로 키웠다.”
이런 이슈가 작품에도 영향을 줄까.
“정치 시스템의 문제를 폭로하거나 역사적 순간을 분석하려는 소설들이 있다. 내 관심사는 소설의 독특한 능력에 있다. 소설에는 개인의 삶을 통해 보편적인 현실을 보게 하는 힘이 있다. 때때로 저널리즘이 하려고 하는 것이기도 한데 정치는 이런 일을 못 한다. 왜냐면 정치는 덩어리들(masses)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볼 능력이 없다. 문학은 사람들이 잊었으면 하고 정치가 바라는 것들을 일깨운다. 내게는 그런 문학의 특징이 정치적인 것이다. 나는 커다란 현실 문제를 비껴가는 방편으로 개인의 내면에 대해 쓰거나 하는 소설을 생각할 수 없다. 코로나 복판에서 이야기 하나를 쓰기 시작했는데 코로나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리는 화가의 이야기다.”
『사랑의 역사』는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다뤄 큰 인기를 누리는 것 같다.
“그렇게 봤나.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은 사랑만큼이나 외로움과 동경에 대한 이야기다.”
어쨌든 주제 면에서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어떻게 쓰느냐, 방법의 문제인가.
“소설은 결국 어떻게 쓰느냐, 형식의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 형식을 규정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했다. 수천 자로 이뤄졌고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을 빼면 확정된 게 없는 형식적 느슨함이 매번 새로운 형식을 발명하게 한다. 그 점이 나를 흥분시킨다.”
과거 인터뷰를 찾아보니 ‘자아(self)’라는 개념이 하나의 발명(invention)이라고 한 적이 있다. 자아라는 건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우리 삶과 경험이 결국 누군가에 의해 말해진 것들로 이뤄지기 때문에 다양한 내러티브(이야기)의 집적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구체적인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나는 우리가 어떤 내러티브를 사용하거나 혹은 사용하지 않거나 하는 방식이 늘 흥미롭다.”

신준봉 전문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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