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비전 31쪽 vs 정대협 1줄…기부금 공시, 이렇게 달랐다

중앙일보

입력 2020.06.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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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계 최대 구호단체 중 하나인 월드비전이 미국 국세청(IRS)에 제출한 2018년도 결산서류 공시는 106장. 본지가 미 국세청 공시 서류를 분석한 결과 월드비전은 31장에 걸쳐 미국 내에서 지출된 253곳에 대한 목록을 적어냈다. 지급처 이름과 주소, 금액, 지급 목적 등을 적어넣었다.

견제 없는 권력, 시민단체<중>

월드비전은 현금이 아닌 물품으로 지급된 경우 금액 뿐만 아니라 장남감, 청소용품, 의류 등으로 구체적인 용도를 표기했다. “LA 걸스 클럽, 장난감 1만 1890달러(약 1414만원)”“산타마리아 헬스센터, 청소용품 5605달러(약 666만원)”“사마리안의 지갑, 의류 12만 5122달러(약 1억4889만원)”등이다.

같은 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국세청 공시에서 안점순 할머니 1인에게 4억7493만원 전액을 지출했다고 기재했다. 지출 목적에 생존자 복지, 수요시위, 박물관 지원 등을 몰아넣었다. 수혜 인원은 9999명이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지난달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인권재단 사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원금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지난달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인권재단 사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원금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장진영 기자

최근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부실 공시 논란으로 시민단체의 불투명한 운영 실태가 그대로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대다수 시민단체는 사회복지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비영리 공익법인에 속해 기부금에 대한 공시 의무를 가진다. 정의연과 전신인 정대협은 국고보조금 수익을 국세청 공시에서 누락하고, 수십 곳에 지출한 기부금을 한 곳에서 쓴 것처럼 기재했다. 수혜 인원으로 99명, 999명, 9999명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정의연과 정대협의 부실 공시 관행은 미국 등 선진국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다. 공시 양식이 한국보다 까다롭고 공시 의무 위반에 대한 처벌도 강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2009년 도입된 국세청 공익법인 공시의 모태가 미 국세청의 ‘Form 990’이다. 공익법인 평가기관인 한국가이드스타와 공동으로 해외 공시 제도를 분석했다.

월드비전의 2018년도 미국 국세청 공시 자료. 미국에서 지출한 496곳 중 일부 목록이 나와있다. 노란색은 지출 용도. 미 국세청

월드비전의 2018년도 미국 국세청 공시 자료. 미국에서 지출한 496곳 중 일부 목록이 나와있다. 노란색은 지출 용도. 미 국세청

2018년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국세청 공시. 안점순 할머니 1인에게 생존자 복지, 수요시위, 박물관 사업 목적의 비용을 모두 지출했다고 공개했다. 국세청 홈택스

2018년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국세청 공시. 안점순 할머니 1인에게 생존자 복지, 수요시위, 박물관 사업 목적의 비용을 모두 지출했다고 공개했다. 국세청 홈택스

①기부금 지출 내역만 30장=미국은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자선단체가 면세 혜택을 받으려면 반드시 국세청에 공시해야 한다. 영국에선 자산 규모가 5000파운드(약 760만원) 이상인 모든 자선단체는 자선사업감독위원회에 등록해야 한다. 한국은 그동안 수입 3억, 자산 5억 이상인 곳만 국세청 공시 의무 대상이었다. 내년부턴 모든 공익법인으로 확대된다.

기부금 사용내역만 요구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기부금 뿐만 아니라 보조금 등의 수익 내역도 공개해야 한다. 미국은 5000달러(약 594만원) 이상의 지출이 있을 경우 별도 서류를 통해 목록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세청도 지출 금액이 100만원 이상인 경우 누구에게 얼마를 썼는지 기재하도록 하고 있다. 정의연은 2018년도 공시에서 50곳에 지출된 3300만원을 맥줏집 한 곳에서 썼다고 기록해 논란이 됐다.

아동권리보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은 2018년 한해 미국에서 총 409곳에 기부금을 지출했다고 신고했다. 141장짜리 보고서에서 37장 분량이다. 생계 지원부터 교육 사업, 인도적 지원, 보건 활동 등 다양하게 목적을 기재했다.

월드비전의 미국 국세청 2018년 공시 자료. 10만 달러 이상을 받는 상근 임직원의 보수가 공개돼있다. 미 국세청

월드비전의 미국 국세청 2018년 공시 자료. 10만 달러 이상을 받는 상근 임직원의 보수가 공개돼있다. 미 국세청

정의기억연대의 2019년 미 국세청 공시 자료. 이사 현황만 나와있다. 국세청 홈택스

정의기억연대의 2019년 미 국세청 공시 자료. 이사 현황만 나와있다. 국세청 홈택스

②10만 달러 이상 임원 보수 공개=미국은 10만 달러(약 1억1000만원) 이상을 받는 상근 임원에 대한 보수는 공시에서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박두준 한국가이드스타 연구위원은 “면세 혜택을 받는 공익법인의 책무성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며 “시민단체나 자선단체 운영 여건상 인건비 부담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월드비전은 2018년 한해 평균 주 40시간을 근무한 에드가 샌도발 회장이 48만 4502달러(약 5억 7700만원)를 받았다고 신고했다. 샌도발 회장 다음으로 월급을 많이 받는 임원 15명의 명단과 연봉, 퇴직 임원 3명이 받아간 연봉까지도 적어냈다. 별도 서류에선 각 임직원에게 지급된 월급의 기본급과 상여금 액수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 국세청이 지난 2006년부터 상근 임원의 보수를 공개하도록 하면서 일부 단체의 최고경영자(CEO)는 연봉이 깎이는 사태도 발생했다.

현행 국세청 공시는 이사회 명단만 게재하도록 돼 있다. 정의연 이사장에 앞서 오랫동안 정대협 상임대표를 지낸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총선에서 비례대표 등록을 하면서 재산이 8억원이 넘는다고 신고했다. 자신의 개인계좌로 후원금을 모집한 사실이 드러나 딸 유학비나 아파트 구입에 사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정의연은 윤 의원에게 지급된 인건비 규모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정의기억연대가 지정기부금을 받아 쉼터로 운영한 경기 안성시 금광면 '평화와 치유가 만나는 집'이 본래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파장이 일고 있다.뉴시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정의기억연대가 지정기부금을 받아 쉼터로 운영한 경기 안성시 금광면 '평화와 치유가 만나는 집'이 본래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파장이 일고 있다.뉴시스

③기부자가 외부감사 요구=정의연과 정대협은 외부 감사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아 내부 감사만 진행해왔다고 밝혔다. 한 공익법인 관계자는 “시민단체들이 감사 비용을 대기가 빠듯하다고 하는데, 연간 수입이 20억~30억원 규모면 외부 감사 비용은 300만~40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해 총수입 13억6000만원, 기부금 7억6000만원을 신고한 정의연은 올해 결산 내역에 따라 외부 감사 대상에서 여전히 제외될 수도 있다.

미국에선 아예 기부자가 일정 금액을 외부 감사 비용으로 지정하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기부약정서 체결 시 사업결과보고서와 함께 외부감사 보고서를 함께 요구하는 식이다. 회계사 출신인 배원기 홍익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는 “한국에서도 외국계 선교 단체들은 규모가 작더라도 반드시 저명한 회계 법인에 가서 감사를 받더라”며 “정대협에 10억원을 지정 기부한 현대중공업이 외부감사인을 지정했으면 향후 사업과정을 잘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75만 달러(약 8억 9200만원) 이상의 정부 보조금을 받는 경우 외부감사보다 엄격한 기준의 단일감사를 받아야 한다.

유럽에선 각 기관 특성에 맞게 외부감사 보고서를 작성해 공개하고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 소재한 국경없는의사회(MSF)는 2018년 KPMG와 언스트앤영 회계법인 두 곳에서 외부 감사를 받은 보고서에 의사, 간호사, 약사 인력 현황과 의료 물품 지원 등에 쓰인 지출 내용을 공개했다. 영국의 구호기구 옥스팜은 별도의 책임성 보고서를 발간한다. 옥스팜의 재정상태 및 사회적 성과가 담겨있는 이 보고서는 옥스팜이 속한 시민단체연합 ‘어카운터블나우’가 지정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2년에 한 번씩 작성된다.

정의연의 부실 회계 사태 이후 국제구호개발 단체인 굿네이버스에선 한 달 만에 약 4000여 명의 정기 후원자가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체의 관계자는 “4000명을 모으는 게 얼마나 힘들지 생각해보라”며 “정의연이 기부 문화에 대한 사회적 불신을 조장했다”고 지적했다.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이 29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활동 기간에 불거진 부정 의혹 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중앙포토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이 29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활동 기간에 불거진 부정 의혹 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중앙포토

정의연 논란을 계기로 국세청으로 공익법인 관리를 일원화하는 등 법적·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자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한국은 국세청이 공시는 담당하지만, 법인별로 주무 부처가 따로 있고, 회계 공시 양식 자체는 기획재정부 소관이다.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미국은 비영리법인부터 지정기부금 단체 업무까지 국세청이 총괄한다”며 “국세청이 검찰과 연계돼서 부정 회계 기관을 고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민간에서 시민단체의 회계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자는 주장도 있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의 글래스포켓(Glasspocket)을 예로 들며 “시민단체에 가장 무서운 페널티는 기부금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라며 “미국은 이곳의 인증을 못 받으면 사람들이 기부를 안 하는 선순환적 구조”라고 설명했다.

위문희·김지아 기자 moonbrigh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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