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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중 9개 얼어서 못 팔아요” 나주배 10년 키운 농민의 한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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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 3일 전남 나주시 다시면의 한 과수원. 과수원 주인 이보헌(48)씨가 추석 대목까지 한참을 더 키워야 할 배 열매가 달린 가지를 꺾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10개 중 9개는 얼어버려 팔지를 못하는 상태”라며 “나주서 배를 키운 10년 동안 이런 심각한 냉해(冷害)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4월초에 영하 4도 이상기온 찾아와 #열매 350개 맺히던 나무에 1개 달려 #간신히 맺힌 열매도 상품성 없어 #냉해도 속상한데 보상도 30% 줄어

나주배는 매년 4월 개화기를 지나 6월쯤이면 배꽃 하나당 5~6개의 푸른 열매가 맺힌다. 배 과수원은 6월 초여름을 앞두고 열매를 솎는 적과(摘果) 작업을 하는 일꾼으로 북적여야 하지만 이날 4만㎡(1만2000평)의 과수원에는 일꾼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씨는 “매년 이맘때면 일꾼 30명이 매일같이 와서 1000여 그루의 열매를 솎고 봉지를 씌운다”며 “그런데 열매가 전부 동상에 걸려 팔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 손을 놓은 것”이라고 했다.

지난 3일 전남 나주시 다시면의 한 과수원에서 농민이 지난 3~4월 동안 이상기온으로 냉해 피해를 입어 모양이 변하고 표면이 얼룩진 나주배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3일 전남 나주시 다시면의 한 과수원에서 농민이 지난 3~4월 동안 이상기온으로 냉해 피해를 입어 모양이 변하고 표면이 얼룩진 나주배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나주배원예농협에 따르면 나주 지역은 지난 4월 초 8일 동안 서리피해가 있었다. 지난 4월 6일에는 영하 4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등 이상기온 현상 때문이었다. 앞서 3월 초·중순에는 평균 10도를 웃도는 따뜻한 날씨 때문에 배가 일찍 개화기에 접어든 것도 피해를 키웠다. 나주배농협은 2000㏊ 규모의 나주배 과수원의 올해 착과율이 22%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했다.

나주시 다시면에서 배나무 450그루를 키우고 있는 이권재(76)씨는 “열매가 350개 맺히던 배나무가 올해는 고작 1~2개 열매만 맺혔다”며 “지난해 포장지를 13만장을 썼는데 올해는 단 한장도 못 썼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한파를 견디고 간신히 맺은 열매도 표면에 까만 얼룩이 생기고 모양도 이상해 상품성이 없다”며 “먹을 수는 있겠지만, 색깔과 모양이 안 좋아 팔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냉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입은 농가도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5분의 1 수준까지 곤두박질할 것으로 보고 있다. 나주 청동 지역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는 한 농민은 “우리 과수원이 나주에서 제일 많이 배가 달린 편”이라면서도 “매년 7만개 열매에 배 포장지를 씌웠는데 올해는 2만개도 못 될 것 같다”고 했다.

농민들은 팔 수 없는 열매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키워야 한다. 냉해를 입은 해에 새순을 틔워내는 데 힘을 쓴 나무는 다음 해 꽃을 피우지 않기 때문에 열매도 달리지 않아서다. 이씨는 “돈 되는 열매가 하나도 없더라도 지금 신경쓰지 않으면 내년에는 과수원을 갈아엎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올해 풍수해 보험의 보상률이 감소한 것도 농가의 시름을 깊게 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 등이 지원하는 농작물 재해보험의 냉해 보상률이 지난해 80%에서 올해 50%로 줄어서다. 이는 배 1개당 약 790원의 보험가가 책정될 경우 이 중 395원만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나주배농협 관계자는 “배농가에 대한 지원대책과 농작물 재해보험 보상 개선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농림축산식품부에 전달했지만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라며 “농협 자체 재원으로 냉해 관련 농약을 긴급지원하는 등 대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정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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