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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김이나 "유행어 안 넣어…몇년 못가 낡아버리니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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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출간한 작사가 김이나 씨가 8일 서울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에세이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출간한 작사가 김이나 씨가 8일 서울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찬란’이라는 단어는 ‘ㄴ’이 받쳐준 뒤 뛰어오른다고 할까요? ‘구름’이라는 단어는 소리만 들어도 질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후루룩… 거품 같은 느낌이요.”

400여 히트곡 감성 담은 첫 에세이집 내 #“동음이의어 많은 한국어, 노랫말로 훌륭”

K팝이 세계에서 따라 불리는 요즘, 노랫말로서 한국어는 어떤 언어냐는 질문에 작사가 김이나(41)는 “한국어야 말로 노랫말로서 가장 좋은 언어”라며 이렇게 말했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 아이유의 ‘좋은 날’, ‘분홍신’, 조용필의 ‘걷고 싶다’, 박효신의 ‘숨’ 등 다양한 장르의 많은 히트곡을 만들고, 400여곡의 저작권을 가진 그는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작사가다. 특히 20·30 여성들에겐 ‘내 얘기’라며 작사가로서는 드물게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그녀는 얼마 전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27대 ‘별밤지기’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이라는 첫 에세이집을 펴낸 그녀를 8일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작사가로서 갖는 언어에 대한 생각과 그와 관련한 삶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에세이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출간한 작사가 김이나 씨가 8일 서울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에세이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출간한 작사가 김이나 씨가 8일 서울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작사가로서 언어와 관련해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음으로서의 글자를 좋아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책읽는 것도 소리내서 읽었고, 좋아하는 단어들을 보면 꼭 소리내서 읽는다. 구슬, 유리, 찬란, 구름 같은 단어들이다.”

-한국어는 받침도 복잡하기 때문에 노랫말로는 따라부르기도 어렵고 제한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영어보다 다양한 동음이의어가 있어서 선택지가 많다. 같은 뜻을 지니면서도 발음이 부드럽거나 딱딱한 쪽을 선택할 수 있어 발음확장성이 큰 언어다. 그래서 한글만으로 가사를 써도 어감에서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티아라의 ‘너때문에 미쳐’라는 노래에 ‘철없게’라는 가사가 등장하는데, 눈으로 텍스트를 보면 받침이 있어 불편하지만 소리로서는 유연하게 넘어간다.”

-그럼에도 가사에 잘 선택하지 않는 한국어가 있다면?
“유행어다. 유행어는 정말 유통기간이 짧다. 한 번도 안 써본 건 아닌데 몇 년 못 가서낡아 버린다. 내가 가사를 쓸 때는 핫해도 음반이 발매될 때쯤엔 촌스러워져 있다. 그래서 되도록 피하는데 간혹 제작자 들 중에서 ’이런 유행어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럴 땐 민망하지만 사용한다.”

에세이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출간한 작사가 김이나 씨가 8일 서울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에세이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출간한 작사가 김이나 씨가 8일 서울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책을 보면 ’영감은 체력에서 온다‘며 체력을 강조했다. 젊은 감각과 감성이 생명인 직업인데 40대다. 전보다 어려워진 것은 없나?
“예전보다는 댄스곡을 맡으면 어렵다(웃음) 댄스곡도 여러 종류가 있다. 쿨(혼성그룹)의 '운명'처럼 가사에 서사를 넣는 댄스곡도 있고, 레드벨벳의 '빨간맛'처럼 감각적 단어가 배치되는 댄스곡도 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엔 나와 확실히 멀어진 것 같다. 굳이 감각을 흉내를 내기보다는 나의 방식대로 풀어보려고 한다. 나이 든 사람이‘~하삼’처럼 젊은 사람 말을 흉내를 내면 티가 나지 않나.”

그는 책에서 나이가 들면서 내 언어의 나이 듦을 인정하는 순간이 유쾌하진 않았지만, 나이가 들었기에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을 발견했다며 이선희의 ‘그 중에 그대를 만나’를 꼽았다. 그 순간을 ’혼자만의 2막을 연 기분‘이라고 적었다.

에세이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출간한 작사가 김이나 씨가 8일 서울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에세이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출간한 작사가 김이나 씨가 8일 서울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작사가로서 언어를 재발견하게 해주는 것들은 무엇인가?
“김훈 작가의 글이다. 재미도 있고, 몇 가지 표현을 안 쓰고 ‘어떻게 이런 감정을 들게 하지?’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정말 필요할 때 말고는 뺄 단어가 없다. 너무 근사해서 재미를 떠나서 한 문장이라도 보려고 펼쳐본다. 같은 맥락에서 가사가 안 풀릴 때 정치ㆍ경제면이나 판결문이나 기자의 사적인 미사여구가 절대로 안 들어가는 기사를 본다. 향수 사러가면 중간에 커피 냄새 맡으며 중화하는 것과 같다. 표현에 표현을 거듭하다 보면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공한 전문직 여성인데, 책을 보면 생존의 중요성이나 살면서 처하게 되는 잠시의 비참함에 연연하지 말자고 강조한 것이 인상적이다.
“음악 쪽을 동경했지만, 벤처회사를 거쳐 계측기를 만드는 회사에 다녔다. 음악 산업에서 일하고 싶어서 공연기획사에도 이력서를 내봤지만 떨어졌다. 재능만으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 살아남아야 무엇인가 펼칠 기회도 있는 거니까. 지금도 클라이언트가 가사를 바꿔 달라고 요구하면 자존심을 내세우진 않는다.”

-작사가 김이나를 음악으로 이끌어준 계기를 꼽는다면?
“원래는 작사가보다 작곡가를 동경했다. 초등학교 때 ‘추억속의 그대(황치훈)’와 ‘입영열차 안에서(김민우)’를 들으며 두 가수의 팬이 됐는데, 찾아보니 두 곡의 작곡가가 모두 같은 사람(윤상)이더라. 나만의 ‘황금알을 낳는 오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후로 어떤 노래가 좋아지면 작곡가를 확인하게 됐고, 그 작곡가의 다른 노래가 듣고 싶으면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없으니 압구정동에 있던 ‘판타지아’라는 음반가게 사장님에게 아무개 작곡가가 참여한 음반을 부탁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사장님은 김현철씨가 정식데뷔 하기 전 가져온 자작곡들을 듣고는 본인이 테이프를 만들어 판매했던 전설적인 분이셨다. 돌이켜보면 나를 음악에 입문시켜 준 분이다. 가게는 오래전 문을 닫았는데 꼭 찾아뵙고 싶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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