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IT피로 증후군… 몸과 정신 야금야금

중앙일보

입력

#장면 1〓이달 초 보안 솔루션 업체인 A사 연구원 2명이 1주일 사이에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이들은 몇 달째 연구실 간이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며 개발에 몰두해 왔었다. 이중 한 명은 퇴원했지만 간 이상을 진단받은 또 한사람은 11월말까지 입원해야 한다.

홍보실 金모 대리는 "벤처업계에서 근무환경이 좋다는 평판을 들어와 직원들 건강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며 "이를 계기로 전 직원에게 긴급 건강검진을 실시했다" 고 말했다.

#장면 2〓 "직원들의 스트레스와 건강을 위해 어떤 배려를 하느냐고요? 지금 벤처업계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무슨 사치스런 발상입니까. " 테헤란로 뒤편의 전자상거래 솔루션업체 B사의 尹모(37) 사장은 기자의 질문에 어이없다는 반문이다.

하지만 그러는 尹사장 자신도 두달 전 신장 수술을 받았다. 지병이었다지만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 창업 후 병원 한 번 못찾고 키워온 병임을 직원들은 알고 있다.

#장면 3〓지난 19일 미국의 벤처투자가 겸 컨설턴트인 존 네샤임 코넬대 교수가 방한해 강연을 가졌다.

벤처스카이(http://www.skyventure.co.kr)가 운영하는 ´한국벤처포럼´ 의 월례행사였다.

´성공의 키워드´ 를 듣기 위해 모인 2백여명의 벤처CEO 등 업계관계자들에게 네샤임 교수가 먼저 꺼낸 말은 "당장 오늘부터 하루 30분이라도 운동해라. 또 단 몇 분간만이라도 다른 사람과 단절된 자기 시간을 가지라" 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경쟁은 치열하고 성공확률은 낮은 벤처기업에서 밤낮없이 일에 매달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칫 건강을 잃을 경우 주요 구성원 몇 몇에 의존하는 벤처회사의 속성상 경쟁력을 잃는다는 경고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다 주춤거리고 있는 정보통신(IT) 종사자들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IT 피로증후군´ 이다.

네트워크.통신.e-메일 등 업무효율을 올리기 위한 정보통신 기술의 진보가 이들 종사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증후군은 올해 부침이 격심한 닷컴 벤처기업들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다.

석달이 멀다고 바뀌는 신기술, 자유롭지만 ´여유´ 없는 격무로 쌓여 온 스트레스가 때 마침 닥친 자금 한파와 함께 곪아터지고 있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많다. 회사가 문을 닫는 극단적인 경우 외에도 월급을 삭감하거나 인원을 줄이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조금 나은 회사의 직원들도 ´수익모델´ 을 당장 발굴하라는 등의 무리하고 급박한 요구에 할 말을 잊는다.

또 벤처기업들은 e-메일.핸드폰 등 통신수단과 함께 꽉짜인 하루 일과를 직원들에게 요구한다. 치열해진 경쟁상황과 맞물려 1년 365일을 ´업무 가능´ 시간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눈만 뜨면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품이 등장하는 경쟁 환경도 고통거리다.

한국정보공학 유용석 사장은 "자금.인력을 투입한 프로젝트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일이 흔하다" 고 말한다.

IT피로증후군의 종류는 다양하다. 꼭 몸에 병이 생기는 것만도 아니다.

"지하철 벽면에 붙은 온갖 닷컴광고들을 샅샅이 보지 않으면 불안해요. 남편이나 친구와도 회사 얘기 외에는 대화가 없어요. "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근무하는 韓모씨(여.27) 의 고백은 불안정한 근무환경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증세를 보여준다.

테헤란로 입구에 자리잡은 백상신경정신과 강희찬 박사는 "경쟁은 심하고 환경은 열악한 벤처기업에서는 신체적 리듬에 맞춰 생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며 "두통.변비 등 가벼운 증상부터 위장장애.간 이상 등 큰 병까지 심인성 스트레스의 폐해는 넓고 깊다" 고 말했다.

IT피로증후군은 벤처업계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종사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은 조직이라 한 두 명의 건강 이상도 생산성과 경쟁력에 큰 차질을 준다. 또 업무환경이 더욱 각박해지면서 인력의 이직.전직을 가속화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달 발표한 ´벤처기업 인적자원 관리의 특성과 과제´ 보고서는 이런 현상을 수치로 보여준다.

8월말 2백56개사 6백60여명을 조사한 결과 27.8%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었고 63.1%는 앞으로 찾아볼 생각이라고 응답했다.

창의적인 두뇌를 가진 인력확보가 과제인 IT업계에 진짜 위기가 오는 것이다.

강희찬 박사는 "스트레스의 원인을 깨닫고 그것이 치료해야 하는 심각한 질환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며 "산업재해에 대응하기 위해 의료진을 두거나 상담계약을 하는 기존 제조업체의 산업의학적 대응을 IT관련 기업에서도 도입할 때가 됐다" 고 말했다.

이승녕.이소영 기자, 황세희 전문위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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