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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제재 방어적으로 해석 말라? 임종석 작심발언 위험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근 대담에서 "남쪽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선 대북 제재를 너무 방어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적극적 제재 해석론'을 제시해 파장을 낳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근 대담에서 "남쪽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선 대북 제재를 너무 방어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적극적 제재 해석론'을 제시해 파장을 낳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처럼 제재를 너무 방어적으로 해석해서는 절대로 남쪽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22일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창작과 비평’ 대담에서 제기한 ‘적극적 제재 해석론’이 파장을 낳고 있다. 야인 신분인 임 전 실장은 이날 “한ㆍ미 워킹그룹에서 통일부가 빠져야 한다. 경우에 따라 과도한 해석을 내세우는 워킹그룹에 들어가 있어서 뭘 할 수 있겠나” 등의 작심 발언을 했다.

그러나 임 전 실장의 발언대로 자칫 제재의 ‘적극적 해석’을 했다간 한국 기업들이 대북제재 위반에 걸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할 건  한국 은행ㆍ금융권에 대한 제3자 제재(세컨더리 보이콧)다. 아직 한국 금융권이 대북제재 리스트에 오르거나 규정 위반으로 벌금을 문 사례는 없지만 “갈수록 위태롭다”는 분위기가 업계 내부에서 감지되고 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중 경쟁이 과열하는 와중에 한국의 독자적인 움직임이 미국의 전략적 대응에서 이탈하는 모양새가 되면,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세컨더리 보이콧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촘촘한 미국의 제재 앞에 한국의 ‘동맹국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보장할 수 없다는 조언이다.

특히 이란제재와 관련해 최근 한국 은행이 1000억대 벌금을 문 사례가 적발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재 앞에 동맹국 효과? 글쎄…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5월 북한 석탄을 불법 운송하는 데 사용돼 국제 제재를 위반한 혐의를 받는 북한 화물선 '와이즈 어니스트'(Wise Honest)호를 압류했다고 밝혔다. [미 법무부 홈페이지 자료 캡처=연합뉴스]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5월 북한 석탄을 불법 운송하는 데 사용돼 국제 제재를 위반한 혐의를 받는 북한 화물선 '와이즈 어니스트'(Wise Honest)호를 압류했다고 밝혔다. [미 법무부 홈페이지 자료 캡처=연합뉴스]

지난달 20일(현지시간) 미 뉴욕주 남부지검은 무려 10년 전 이란 제재와 관련된 사건으로 한국 기업은행에 8600만 달러(약 1049억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미국이 이란ㆍ북한 관련 경제 제재는 물론 중국을 압박할 때 기본 골격이 되는 긴급경제권한법(IEEPA) 등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앞서 한국의 수입업체 A사는 2011년 2~7월 “이란의 대리석ㆍ루비 중계무역을 한다”고 속여 기업은행에 개설된 이란 중앙은행 원화결제 계좌를 통해 1조 948억원가량을 인출, 기업은행 뉴욕지점을 통해 5~6개국 계좌로 분산 송금했다.

이 사건에서 한국 검찰과 법원은 기업은행이 A사 대표에게 이용당한 피해자라고 판단했다. 2014년 대법원은 이 회사 대표에 대해 외국환 관리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확정했다. 이때 법원은 기업은행에 대해서는 “뉴욕지점의 준법감시인이 의심 거래를 포착했고, 본점은 거래를 중단시켰다”는 점을 인정, 죄가 없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미 검찰은 “기업은행이 자금세탁방지(AML·Anti-money laundering)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운영하지 않았고, 이에 따른 관리ㆍ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정반대의 판단을 내렸다. 미 재무부는 금융권에 ‘고객확인제도(KYCㆍKnow your customer)’를 통해 누가, 어떤 은행에서, 왜 송금을 하는지 모니터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은 기소를 유예하는 대신 벌금을 내는 것으로 합의됐다.

이번 사례는 한국 금융기관들이 의도적으로 제재를 어긴 게 아니더라도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이란 다야니 가문의 대우 일렉트로닉스 인수 사건에서 한국 정부가 국가ㆍ투자자 소송(ISD)에서 패소하고도, 시중 은행들이 이란 제재를 두려워해 손해배상금을 송금할 곳을 찾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한국 은행들이 이용된 사례는 북한 관련 거래에서도 심심찮게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10월 대구지법은 북한산 석탄의 원산지를 속여 국내로 밀반입한 수입업자 B씨에 대해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B씨 등은 2017년 4~10월 8차례에 걸쳐 북한산 석탄(무연성형탄 등) 3만 8118t과 선철 2010t을 러시아산으로 속여 들여온 혐의를 받았다.

이번에도 한국 법원은 B씨 등이 선박을 이용해 석탄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은행이 가짜 선하증권 등을 모르고 신용장을 내준 '피해자'라고 적시했다. KEB하나은행을 비롯해 산업·기업ㆍ우리은행 등이 ‘사기 범죄의 피해자’라는 점을 상세하게 설시했다. 반면 미 당국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백악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제재의 촘촘한 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AP=뉴시스]

물론 미국의 대(對)이란 접근법과 대북한 접근법에 차이가 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는 있다. 미 정부는 이란에 대해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이 “이란의 석유 수출을 제로(0)로 만들겠다”며 강하게 압박을 해온 반면, 북한은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분명 있다.

실제 지난해 3월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이 북한의 제재 회피를 도운 중국 해운회사 2곳을 제재 대상으로 올렸을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내가 방금 대규모 제재를 철회하게 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제재 철회’ 소동 이후 외교가에선 미 재무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속도 조절’을 한다는 말이 나왔다.

임 전 실장이 22일 “(워킹그룹에서 통일부가 빠지는 등) 이걸 한다고 한·미동맹이 흔들릴 리도 없을뿐더러…”라고 말한 대목에는 이런 기류가 반영됐을 수 있다. 이 발언에는 미국이 동맹국을 상대로 제재를 때리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감도 읽혔다.

그런데 재무부의 ‘블랙리스트 지정’과 이미 있는 대북제재법을 지키는 ‘준수(compliance)’의 문제는 전혀 별개로, 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박사는 “기업은행 사례처럼 한국 은행이 걸리는 경우는 법률·규칙과 같이 이미 정해진 룰을 지키는 문제로, 백악관 등 정부와는 별도로 움직이는 사법적 영역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와 관련 “(북한 관련 업체가) 한국에서 중국 은행에 위안화로 송금하더라도, 한국 시중은행은 미국 금융 시스템을 거쳐 송금하게 돼 있다”며 “섣불리 계좌를 열어 줬다가 제재 위반이 될지를 과연 정부 차원에서 담보해줄 수 있느냐”고 우려했다.

임 전 실장을 포함해 정부 일각에서 남북 교류의 훼방꾼처럼 말하는 한ㆍ미 워킹그룹에 대해 미국이 전혀 다른 입장을 내놓는 것도 이런 인식 차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 측에선 “동맹국인 한국이 제재 위반에 걸리지 않도록 (돕기 위해) 통로를 만든 것”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독자 제재는 '하나하나 제재 예외를 인정받기보다, 미 의회에서 특정 사업을 예외로 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게 빠를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행정명령·법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워킹그룹을 이런 제재 규정을 신속하게 유권해석 하는 ‘패스트 트랙’으로 여겨야 한다는 시각이 국내에도 있다.

이유정ㆍ백희연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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