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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남아공식 5·18 재조사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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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난제에 부닥치면 흔히 찾는 방안이 있다. 옛 성공 모델을 골라 적용하는 거다. 하지만 많은 경우 실패한다. 조건이 크게 다름에도 이를 간과한 탓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주 민주화운동 의혹 규명 차원에서 남아공식 ‘진실화해위원회’ 모델을 활용하겠다는 구상이 이런 케이스 같다.

광주 민주화운동과는 상황 달라 #자진 출두 인센티브 있어야 효과 #5·18 진상규명위와 중복 논란도

그는 지난 18일 5·18 40주년 기념식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제라도 진실을 고백한다면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이는 “남아공식 진실화해위원회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게 문 대통령의 설명이었다고 청와대 측은 전한다.

새삼 조명을 받게 된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는 오랫동안 저질러진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1995년 12월 설치된 기구다. 위원회는 공소시효에 구애받지 않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되 직무 때문에 인종차별에 가담했을 경우 진실 고백을 전제로 사면해 줬다. 이런 파격적인 원칙 덕에 위원회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2만1000여 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가해자 7500여 명을 조사한 뒤 다수를 처벌했지만 840여 명은 사면했다. 문 대통령도 의혹에 연루된 관련자들이 사면을 바라며 자진 고백할 거라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이 방식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옛 남아공과 지금의 한국 상황이 크게 다른 탓이다. 남아공의 경우 백인 정부가 몰락하고 만델라 정권이 들어선 지 1년 반 만에 위원회가 들어섰다. 자연히 살기등등한 흑인들의 위세에 짓눌린 백인들이 언제 보복당할지 몰라 겁에 질린 시기였다. 흑인을 박해한 백인으로서는 법정에서 죄를 고백한 뒤 용서를 받는 게 훨씬 안전한 일이었다는 얘기다. 자신의 죄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가 많아 어떤 비리든 금세 들통날 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광주 민주화운동은 어떤가. 40년의 세월이 흘러 물증 확보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됐다. 관계자들의 기억마저 희미해졌다. 게다가 발포 명령자 색출, 헬기 사격 여부, 집단학살 및 암매장 의혹 등 민감한 사안들은 여러 차례의 조사에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실제로 1988년 국회 5·18 청문회, 1995년 검찰의 5·18 수사에 이어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 조사를 통해서도 의혹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흑역사가 실재한들 누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제 발로 걸어나와 죄를 실토하겠는가. 남아공 때에는 확실한 인센티브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마땅한 유인책이 없다는 얘기다.

진실화해위원회 설치를 신중히 검토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다름 아닌 중복 설치 문제다. 현 정부에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라는 기구가 지난 1월 설치돼 활동 중이다. 이 조직의 목적도 이름 그대로 5·18 관련 의혹 규명이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4년간의 활동 끝에 2010년 끝난 진실화해위원회를 부활시켜 다시 광주 민주화운동을 캐려 한다. 낭비 아닐까. 행정기관위원회법 7조는 “성격과 기능이 중복되는 위원회를 설치·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정부는 그럼에도 2기 위원회 규모를 1기 때와 비슷하게 구성해 12월 초에 출범시킨다고 한다. 1기 때는 인원 180명에 4년7개월 동안 약 600억원을 썼다. 한 해 130억원꼴이다. 매년 대학생 2000명에게 전액장학금(지난해 평균 연간 등록금 644만원)을 주고도 남는 액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남아공뿐 아니라 아프리카 20개국에서 시행했던 제도다. 남아공과 케냐 등에서는 옛 독재정권의 비리를 청산하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큰 몫을 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간다·부르키나파소 등에서는 갈등을 심화시키고 정적 탄압에 악용됐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문재인 정부 역시 합리적인 검토와 대책 없이 2차 진실화해위원회를 밀어붙인다면 광주 민주화운동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