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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했던 말 자꾸 또 하는 어머니의 속마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한세의 노인복지 이야기(40)

“한세야, 네 형이 저혈당으로 건강이 생각보다 안 좋다는구나. 잘못하면 큰일 날 수 있대. 형이 지방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저혈당 쇼크를 대비해 꿀물을 준비해 둔다는구나.”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나에게 말을 건넸다. 몇 달 전 형이 운영하는 회사의 철원 공장 관리자로 있는 사촌 형이 어머니에게 한 전화 내용이다.

형이 저혈당 증세가 있다는 것은 작년 형 부부와 어머니 모시고 점심 식사 때 진작에 나왔던 이야기다. 식구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어머니는 마치 새로운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사촌 형의 똑같은 전화 내용을 전하는 것도 이번이 네 번째다. 그것도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말이다.

사촌 형 전화 내용 이야기를 세 번째 했을 때 “어머니, 그 이야기는 지난번에 하셨어요”라고 조금 퉁명스럽게 답하자, 어머니는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어머니와 커피를 마시는데 사촌 형에게 전화가 왔었다며 저혈당 쇼크를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신다. 이번이 네 번째이지만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답변하자 어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진 pixabay]

어머니와 커피를 마시는데 사촌 형에게 전화가 왔었다며 저혈당 쇼크를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신다. 이번이 네 번째이지만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답변하자 어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진 pixabay]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 모자간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사촌 형에게 전화가 왔었다는 이야기를 또 꺼낸 것이다. 이번에는 세 번째 들었을 때와는 달리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나저나 운전 중 저혈당 쇼크가 오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늘 꿀 같은 당분을 챙겨 두어야 한다네요.”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답변하자 어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며칠 전 어머니가 충남 청양에 사는 당신의 여동생에게 전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영자야 잘 지냈지? 큰아들이 저혈당으로 꿀이 필요한 것 같은데, 예전에 보내주곤 했던 꿀을 어디서 구매할 수 있는지 전화번호 좀 알려다오.” 구순이 다 된 어머니는 주섬주섬 청양 이모가 알려주는 전화번호를 종이에 꾹꾹 눌러 적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의 네 번째 반복되는 이야기에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하자 “그래, 네 큰형이 걱정이다. 내가 10여 년 전에 청양 동생을 통해 꿀을 산 적이 있는데, 여기서 살 수 있다는구나. 두병만 대신 구매해다오. 네 형 주어야겠다. 돈은 내가 낼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어머니는 꾹꾹 눌러 볼펜 자국이 선명한 종이쪽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사실 꿀은 농협에 가면 언제든 살 수 있고 값도 그리 비싸지 않다. 굳이 청양의 잘 모르는 양봉업자에게 전화해 송금하고 택배를 부탁하는 일이 더 번거롭다. 그렇지만 “네 어머니. 그렇게 할게요”하고 어머니가 준 전화번호를 담담히 받았다. 경직으로 인해 어머니의 펴지지 않는 둘째 손가락 마지막 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노인의 대화 방식이 젊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어머니의 대화를 보면 반복성과 이중화법이 많다. 반복성은 한 얘기 자꾸 또 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회사 별일 없지?” “네 집사람과 사이는 좋지?” “건강 항상 조심해라” “네 형이 이번 주말에 온단다” 등이다. 회사에 큰일이 있거나, 내가 아내와 다투거나, 내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형이 주말에 온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이런 형식적인 질문 이외에도 “이번 주는 TV로 미사 보고 성당 가는 것은 쉬련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너는 좌도 우도 정치색 갖지 말고 조심해라” “내일은 분리수거하는 날이니 종이 박스 밖에 내다 놓아라” 등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잊을 만하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어머니가 “나이가 드시니 역시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건망증이 심해지시나? 그렇다고 치매 초기 증상은 아닌데”라고 생각했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으신 게 아닐까. 이번에 형 부부가 집에 오면 어머니가 청양 꿀 사준다는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한데 "엄지 척" 하자고 메시지를 보내놓아야겠다. [사진 pixabay]

어머니는 자식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으신 게 아닐까. 이번에 형 부부가 집에 오면 어머니가 청양 꿀 사준다는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한데 "엄지 척" 하자고 메시지를 보내놓아야겠다. [사진 pixabay]

어머니는 건망증도 치매도 아니다. 외로운 마음에 그저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막상 이야기를 하자니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와의 공통 화제나 어미로서 자식을 생각해 주는 화두를 꺼내게 된다. 보통은 “예. 괜찮아요” 혹은 “알았어요”라고 건성으로 대꾸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지만 가끔은 나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어머니 말에 반응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도 한다.

청양 이모에게 연락해 양봉업자 전화번호까지 적어둔 어머니의 네 번째 반복되는 꿀 이야기에 “지난번 세 번이나 말씀하셨어요”라고 건망증 환자 대하 듯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저 아들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넘어 어머니도 어미로서 자식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다음 주 형 부부가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오면 어머니가 청양의 꿀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형님 부부는 “아이고, 어머니 집에 꿀 많아요.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필요하면 저희가 알아서 사 먹을게요”라고 답할 것이다. 형 부부가 오기 전 카톡을 보낼 예정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어머니가 꿀 이야기를 꺼내면 “청양 꿀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대요. 역시 어머니는 생각이 깊어요. 우리 어머니 최고” 이렇게 ‘엄지 척’ 하자고 말이다.

스파이어리서치&컨설팅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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