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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남편과 같은 무덤 묻히기 싫다던 어떤 어르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41)

요즘, 부부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화제다. 모이면 부부관계 이야기로 미주알고주알 말도 많다. 연출자가 원작을 한국적인 정서로 바꿔놓아서 공감이 된다. 부부란 어떤 말로도, 생각으로도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오묘한 만남이다.

오늘은 한 어르신이 살아 온 부부의 세계를 그려본다.
옛날도 아닌 옛날, 첩첩산골 시골서도 부자, 또는 남자의 권력을 과시한 수단은 첩을 두는 거였다. 한 어르신의 남편도 땅 많고 호색가여서 젊은 시절부터 두 집 살림을 했다. 바로 길 건너에 작은집을 마련해서 살았다. 요즘 같으면 살인사건이 날 판국이다. 눈만 뜨면 보이는, 건너 집에 간 남편은 몇 년이 되어도 길 건너오지 않았다. 동네에선 한 인물 하는 작은댁의 치마폭에 잡혀 산다고 수근 거렸다. 어른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이 낳은 자식 셋과 작은집에서 낳은 자식 둘은 삼팔선을 넘나드는 새처럼 길을 건너다니며 남매가 되어 뛰어 놀았다.

어느 날 작은댁은 돌도 채 안 지난 막내를 포함하여 모두 두고 집을 나갔다. 몇 발짝도 안 되는 그 가까운 거리를 수 년 동안 못 오던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건너왔다. 그들을 내 새끼들과 함께 내 자식으로 보듬어 키웠다. 도망은 작은댁이 갔는데 영감은 부인을 대신 폭행하며 화를 풀었다. 서럽고 힘든 젊은 날이 한이 되었지만 말년에 영감님이 자기 집에서 죽은걸 가장 자존감 있는 큰일로 삼았다.

죽어보면 모든 것이 부질없고 너무 짧을 것 같은 우리네 인생살이, 살아생전에 맺어진 온갖 인연을 청실홍실 엮듯 잘 엮다가 가야지, 유언 같은 거 남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많이 하며 살다 가야지... [사진 Pixabay]

죽어보면 모든 것이 부질없고 너무 짧을 것 같은 우리네 인생살이, 살아생전에 맺어진 온갖 인연을 청실홍실 엮듯 잘 엮다가 가야지, 유언 같은 거 남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많이 하며 살다 가야지... [사진 Pixabay]

어른의 집 방문을 열면 50미터도 안 되는 곳에 남편의 묘가 있다.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시는 그 어른은 아침이면 거기를 들러 풀을 뽑고 관리했다. 나이가 든 자식들이 아버지 곁에 자기 엄마를 합장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눈치싸움을 한다고 했다.

어쩌다 지나는 길에 풀을 뽑는 어른을 만나 물어보았다.
“에그 영감이 그리 애를 먹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래도 좋아요?.라고,,,
어르신은 심상한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호호호~ 내가 매일 풀을 뽑아주며 영감에게 부탁하는 게 있는데 들어 줄려나 몰러” .

“어르신~ 영감님에게 제발 합장은 안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여요?”
어르신은 우째 알았누 하시며 웃으시더니 후렴을 덧붙이신다.
“암만~보기 싫은 얼굴 죽어서까지 마주 쳐다보며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 죽기 싫어지네. 죽어 가루가 되어서라도 자유롭게 훨훨 날아 보고 싶네. 다시 태어나면 좋은 인연 만나서 알콩달콩 사랑도 해보고, 또 받아보고 싶고,,.”
그날 어르신과 함께 꽃 같은 젊은 시절로 돌아가 미운 난봉꾼 영감을 불러내어 북어 두들기듯 하며 많이 울고 웃었다. 80세를 넘게 살았어도 마음은 여린 18세였다.

살아온 이야기를 주절주절 들어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며, 어쩌면 한평생 애만 끓게 한 당신 얼굴 정말이지 죽어서는 안 보고 싶을 거란 생각과, 자식들의 아비로서 한번은 만나 당신을 고생시켜 미안했다는 사과를 받고 싶지 않을까라는, 이런저런 오만가지 생각으로 내 마음까지 어수선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만나 원수같이 투덕거리며 함께했던 우리부부도 생과 사로 헤어졌다. 당신이 죽은 후엔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했지만, 그런 시시한 유언은 무시되었다. 자식들은 그리울 때 찾아갈 곳이 없으면 허전하고 슬프다며 신개념 유골함 아파트에 모셔놓았다. 나도 죽으면 남편 옆에서 죽어서도 같이 산다. 그럭저럭 한평생 함께 살아온 남편은 먼저 떠나서도 나를 많이 챙겨주는 것 같아 고맙다. 그러니 죽어서 만나는 상상을 해도 좋다. 죽어보면 모든 것이 부질없고 너무 짧을 것 같은 우리네 인생살이, 살아생전에 맺어진 온갖 인연을 청실홍실 엮듯 잘 엮다가 가야지, 유언 같은 거 남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많이 하며 살다 가야지...

지인을 통해 그 어르신이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쓴다. 너무너무 궁금하던 장례 이야기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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