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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의 시선

‘과자 1750원’ 지출 밝히는 공익법인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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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처음 호기심이 발동한 건 ‘999’라는 숫자를 놓고서였다. ‘은하철도 999’와 ‘1999년’ 말고는 별로 본 기억이 없는 숫자다. 이게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공시한 2018년도 사업 내용에 우수수 등장했다. 요즘 한창 논란인, 바로 그 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다. ‘기부금품 지출 항목별 수혜 인원’과 ‘지급 건수’ 대부분을 ‘999’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무려 89건이다.

기부금 사용처 세부 공개 않고 #해명이 의혹 키운 정의기억연대 #이용수 할머니 글 곱씹어 보기를

몇몇 언론이 의문을 제기했다. 정의연은 나름 홈페이지를 통해 설명했다. 해명이 조금 엇나가기는 했다. ‘999명’이 아니라 수혜 인원을 ‘9999명’이라고 적은 단 한 부분에 대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비를 입력할 때 쓰는 통상적 방식”이라고 했다.

999명도 같은 뜻이려니 여겼다. 이 대목에서 호기심이 다시 일었다. 통상적이라면 다른 단체도 마찬가지일까. 공익법인 공시 사이트에 들어가 9600여 공익법인 가운데 최근에 공시를 올린 100곳가량의 ‘연간 기부금 모금액 및 활용실적 명세서’를 찾아봤다. 적어도 그중에는 ‘999’가 없었다. 999는 아니지만, 어떻게 나온 숫자인지 궁금해지는 공시가 있기는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2019년도 사업 수혜 인원을 ‘100,000,000(1억)’명이라고 적었다.

정의연은 2019년도 사업을 공시하면서 통상성을 벗어던졌다. 999가 사라졌다. 지출 명세는 좀 간소해졌다. 2019년도부터는 ‘1월 장학사업 외 5406만원’하는 식으로 월별 내역을 합쳐 공시했다. 다른 단체도 대체로 비슷했다.

그 와중에 ‘사회복지법인 성요셉 복지재단’이 올린 공시가 눈에 들어왔다. 장애인 요양원·재활원 등을 운영하는 곳이다. 지난해 사업을 공시하면서 지출 명세 1024건(정의연은 월별로 1건씩 12건)을 올렸다. ‘지로 수수료 240원’ ‘크라운 카라멜콘 메이플 1750원’ ‘오징어땅콩 3번들 기획(3개 묶음 행사 상품을 샀다는 뜻인 것 같다) 2950원’ 등도 있다. 들여다보면서 황송해질 정도였다.

“사용처 세부 내역을 공개하라”는 요구에 “세상 어느 NGO가 활동 내역을 낱낱이 공개하는지 모르겠다”던 정의연 답변이 떠올랐다. 호기심이 재발동해 성요셉 재단에 연락했다. 임보름(47) 사무국장이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자세히 공시하나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후원 받는 공익법인이니 상세하고 투명하게 하는 게 맞다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에 이유를 물으니 당황하는 기색마저 느껴졌다.

다른 곳은 월별로 합쳐 하던데요.
“그런…가요. 몰랐어요.”
‘전출요양-사무비 378만원’은 뭔가요.
“아, 그건 산하 시설에 운영비 등으로 보낸 돈이에요.”

성요셉 복지재단은 특수하다. 대부분 단체는 사용 경비를 미주알고주알 적지 않는다. 거기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인력도 재원도 부족한 시민단체 아닌가. ‘전출요양-사무비 378만원’처럼 누군가 “이게 뭐예요?” 할 때 떳떳하게 해명하면 된다.

그런데 묘하다. 정의연 해명은 되레 의혹을 키웠다. 지난해 정의연 지출 명세서엔 상조회사에 1175만원을 줬다고 나와 있으나 해당 상조회사는 받지 않았단다. 1175만원의 행방이 묘연하다. 한 진보 매체가 보도한 정의연 측 해명은 이랬다. “상조 업체가 입관 용품과 수의 등을 무상 제공하면 우리가 현물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하는데, 그 영수증을 회계처리한 것이다.” 안 준 것을 줬다고 한 게 아니라, 받은 것을 줬다고 했다고? 그렇다면 회계처리에서 종적을 감춘 금액은 1175만원의 곱절로 늘어난다.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자(전 정의연 이사장)와 정치권은 때론 해명을 제쳐놓고 “친일 세력의 공격”이라고 맞받아쳤다. 씁쓸하다. 비판하면 불문곡직 빨갱이로 몰던 독재정권의 잔상 마저 떠오른다.

오랜 기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역사를 지키고 돌보며 바로 세운 정의연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안타깝기는 정의연 당사자들이 더할 것이다. 어찌해야 할까. 최소한 “세상 어느 NGO가 활동을 낱낱이 공개하느냐”라든가, “친일 세력의 공격”이라고 몰아붙여 풀릴 일은 아니다.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그제 입장문을 발표했다. 아무래도 답은 거기에, 그리고 성요셉 재단에 있는 것 같다. ‘30여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나타났던 사업 방식의 오류나 잘못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과정이 아니라 현시대에 맞는 사업방식과 책임 있는 집행 과정, 그리고 투명한 공개를 통해 국민 누구나 공감하는 과정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