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지금 ‘싱글벙글쇼’를 할 시간이네요. 이 시간에 스튜디오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신기해요.” 11일 오후 1시, 33년간 진행한 방송을 마친 다음 날이어서일까. 김혜영(58)씨는 ‘자유인’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는 듯했다.
1만2169일 장수비결 청취율 1위 #결혼식 날도 신혼여행서도 진행 #강석, 불만 있으면 혼자 서운해해 #청취자 오해 살라 정치행사 거절
1만2169일. 그가 강석(68)씨와 함께 MBC 라디오 ‘싱글벙글쇼’를 진행한 날이다. 1987년 1월 16일 잡은 마이크를 2020년 5월 10일 내려놓았다. 1시간 30여분 인터뷰 동안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렸다. 개그맨 이용식씨 등 지인의 위로 전화도, ‘우리 지역으로 휴양오시라’는 한 지자체 전화도, ‘출연해달라’는 홈쇼핑 업체 전화까지 다양했다.
- 방송 장수 비결이 뭘까.
- “‘싱글벙글쇼’를 맡은 직후 도입된 청취율 조사 덕을 봤다. 이전까진 ‘감’으로 했다. ‘3~4년 했으니 오래 했네, 새 얼굴을 기용해야지’라는 식이다. 청취율 숫자가 나오니 라디오 전체 1위인 우리를 교체할 수 없었다. 또, 우리가 좀 무던하다. 담당 피디랑 얼굴 붉힌 적도, 출연료 얘기를 꺼낸 적도 없다. 그런 게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 진행자끼리 다툰 적도 없나.
- “왜 없겠나. 그런데 다퉜다기보다 강석씨가 혼자 서운해하는 식이다. 한번은 ‘스타 명콤비’라는 명절특집 프로그램에 가수 현숙씨와 콤비로 나선 적이 있다. 이후 한 달가량 말을 잘 안 하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너는 나랑 콤비지, 왜 현숙이랑 콤비냐’라는 불만이었다. 그것도 본인이 말을 안 해 건너 전해 들었다.”
- 33년 동안 휴가 거의 못 갔다고 들었다.
- “요즘엔 DJ가 휴가 내고 대타를 세우는데, 우리는 그럴 생각을 못 했다. 1996년에 ‘싱글벙글쇼’가 미국 한인방송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다. 그 기간 방송을 사전 녹음해 내보냈는데, 때마침 강릉에서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졌다. 하필 녹음한 게 신혼부부들의 첫날밤 사연을 소개하는 ‘신혼일기’ 코너였다. 전국이 난리가 났는데 첫날밤 이야기만 나가니. 돌아와서 엄청 혼났다. 외유는 우리 팔자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족과 해외여행도 간 것도 3박 4일 사이판에 딱 한 번이다.”
- 결혼식날에도 진행을 했다고.
- “당일 웨딩드레스 입고 진행했다. 방송 마치고 강석씨가 결혼식장(서울 신길동 공군회관)까지 태워주고, 사회도 봤다.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갔는데, 나는 제주 MBC에서, 강석씨는 서울 MBC에서 진행했다. MBC 라디오에서 첫 이원중계라고 알고 있다.”
- 기억에 남는 청취자 사연은.
- “너무 많은데…. 어느 부부가 이혼하려고 법원으로 갔다. 트럭 타고 둑길을 가면서 우리 프로그램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울고 웃으면서 결국 이혼서류를 찢고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고 돌아왔다더라. 어려운 형편으로 결혼식을 못 올린 부부들에게 합동결혼식을 올려드린 것도 기억에 남는다.”
- 기억나는 가장 큰 위기는.
- “‘신혼일기’ 코너는 아슬아슬한 면이 있었다. 한 번은 수위가 정말 높아 웃지 않으려 입을 틀어막았다. 강석씨는 허벅지를 꼬집고 있더라. 밖을 보니 작가도 피디도 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결국 방송심의위원회에 불려갔는데 ‘진행자를 교체하라’고 했다. 당시 라디오 국장이 안 된다고 우겨 피디만 교체했다. 우리는 ‘꿀단지’ 사건이라 부른다.”
- 하차 계기를 청취자들이 궁금해한다.
- “(MBC 측에서) 이유가 있고, 생각이 있을 것이다. 더 잘되길 바랄 뿐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지 않나. 청취율 23%을 찍기도 했지만, 지금은 낮아졌다. 더 나은 디딤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이제 ‘안녕’을 고하는 게 맞다. 30년이나 무대를 만들어주신 MBC에 다시 감사드린다.”
- 정치권에서 러브콜은 없었나.
- “90년대부터 정치권 행사에 와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론은 ‘MC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로 청취자 중 누군가 소외되거나 불쾌해지면 안 되지 않나. 잘한 것 같다. 그래서 이때까지 진행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한때 신우염 등으로 고생한 김씨는 “청취자 여러분이 내겐 마법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청취자들 사연을 읽고 반응을 보면 그 순간은 아프지 않았다”며 “내가 30년 동안 더 많은 선물을 받고 돌아간다”며 감사를 전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