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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문재인 대통령이 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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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하준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하준호 정치팀 기자

하준호 정치팀 기자

“회사 분위기상 기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애들은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하니 난감하네요.”(공무원 A씨)

“나는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형편이 괜찮지 않냐고 되려 타박하는 자녀들을 보니 무슨 죄를 짓는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자영업자 B씨)

기부의 영어단어 ‘donation’의 어원은 ‘주다’라는 뜻의 라틴어 ‘don’이다. 돈을 ‘주겠다’고 공약하곤, 결국 받을 수 있게 된 이들에게 다시 ‘주라’고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11일부터 신청받는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얘기다.

재난지원금의 취지는 내수 진작을 통한 경제 위기 극복이다.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돈을 줄 테니, 이 돈을 들고 나가서 적극적으로 소비해 위축된 소비심리를 북돋우라는 거다.

여권에서 재난지원금 정책이 아이디어 수준에서 나오기 시작했을 때, 재정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고육지책이라고 생각했다. 코로나19로 소비 여력이 없어진 소득 하위 70%에 바가지 물을 쥐여주면서 당장 눈앞의 불부터 꺼보자고 하는 것 아닌가. ‘총선용 현금 살포’라는 야당의 비판에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오후 청와대 인근 서울 삼청동의 한 곰탕집에서 수석보좌진과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오후 청와대 인근 서울 삼청동의 한 곰탕집에서 수석보좌진과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그런데 곧 민주당에서는 총선 직전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주장하더니 결국 2차 추경안에 이를 관철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버텼지만 여당에서는 “답답한 소리를 한다”며 지청구 댔다. 결국 소득 상위 30%까지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게 됐고, 재정 건정성 우려가 나오자 ‘기부’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차, 이건 매표용이었구나’ 싶을 때 이미 민주당은 177석의 거대 여당으로 변모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참모들과 서울 삼청동의 한 곰탕집에서 점심식사를 했을 때 청와대의 설명은 이랬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어려운 상황이라 가급적 주변 식당을 이용해달라고 독려하기 위한 것이다.”(강민석 대변인) 그러곤 문 대통령은 지난 4일 “형편이 되는 만큼 뜻이 있는 만큼 참여해 주시기 바란다”고 기부를 독려하더니, 지난 7일엔 재난지원금 전액을 기부하기로 했다. 쓰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지급 범위를 두고 당과 정부가 팽팽히 맞설 때 정세균 국무총리에게 ‘서로 윈윈(win-win)하는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는 보도를 보고 놀랐다. 당과 정부의 의견이 갈릴 때 결단하는 게 대통령의 몫 아닌가.”(21대 국회에선 볼 수 없는 한 민주당 의원) ‘윈윈’의 방안으로 나온 ‘자발적 기부’는 재난지원금을 써도, 안 써도 찝찝한 불쾌한 상황을 빚고 말았다.

만약 문 대통령이 재난지원금을 기부하지 말고, 참모진 회식에서 직접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고소득층에 속하지 않는 공무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눈치게임도 이렇게까지 활발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준호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