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맨땅서 기적 일군 '슈팅걸즈'···감동 전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중앙일보

입력

영화 '슈팅걸스' 한 장면. [사진 전북교육청]

영화 '슈팅걸스' 한 장면. [사진 전북교육청]

맨땅에서 공을 차던 시골 중학교 여자 축구부의 우승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개봉했다. 정작 해당 축구부는 영화 개봉 직전 해체돼 선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삼례여중 축구부 이야기다.

[이슈추적] #6일 개봉한 한국 영화 '슈팅걸스' #2009년 여왕기 우승 실화 바탕 #맨땅서 공차며 전국 강호들 꺾어 #'명장' 故 김수철 감독 헌신 담아 #삼례여중 축구부는 3월 해체 #'초·중학교 합숙소 금지' 등 영향

 영화 '슈팅걸스'가 지난 6일 개봉했다. 삼례여중 축구부가 2009년 8월 '여왕기 전국종별여자축구대회'(이하 여왕기) 중등부에서 우승한 실화를 모티브로 2016년 배효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지 4년 만이다.

 당시 전국 최약체로 평가받던 삼례여중 축구부는 고(故) 김수철 감독의 헌신적 지도로 전국 강호들을 물리치고 정상까지 올라 주목을 받았다. 삼례여중은 2009년 8월 23일 경남 함안에서 열린 여왕기 중등부 결승에서 인천 가정여중을 2-1로 누르고 우승했다.

2009년 8월 '제17회 여왕기 전국종별여자축구대회' 우승을 이끈 삼례여중 축구부 맏언니들. 왼쪽부터 이정인·전민찬·최윤희·윤혜리·최빛나·김세은(이상 3학년)양. 김준희 기자

2009년 8월 '제17회 여왕기 전국종별여자축구대회' 우승을 이끈 삼례여중 축구부 맏언니들. 왼쪽부터 이정인·전민찬·최윤희·윤혜리·최빛나·김세은(이상 3학년)양. 김준희 기자

 앞서 그해 6월 '삼례여중이 소년체전에서 은메달을 딴 것은 운'이라는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멎는 순간이었다. 당시 여왕기 대회에서 최빛나는 최우수선수상, 최윤희는 골키퍼상, 윤혜리(이상 3학년)는 수비상, 김수철 감독(당시 50세)은 감독상을 받았다.

 지난 2000년 4월 전북 최초로 삼례여중에 여자 축구팀을 창단한 김 감독은 10년 만에 시합 참가 자격이 있는 선수 13명(이중 2명은 신입생)을 데리고 여왕기 우승이라는 기적을 일궜다. 대부분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선수들은 학교 맨땅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인조잔디구장이 있는 한별고 운동장을 빌려 훈련했다. 삼례여중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학교 숙소에서 선수들과 함께 먹고 자며, 코치도 없이 선수 스카우트부터 버스 운전까지 '1인 다역'을 맡았던 김 감독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 아이들이 '영웅'"이라며 제자들에게 공을 돌렸다.

최약체로 평가받던 삼례여중 축구부를 2009년 소년체전 준우승, 여왕기 우승으로 이끈 고(故) 김수철 감독. 김준희 기자

최약체로 평가받던 삼례여중 축구부를 2009년 소년체전 준우승, 여왕기 우승으로 이끈 고(故) 김수철 감독. 김준희 기자

 김 감독은 이듬해인 2010년 2월 삼례여중을 떠났다. 대신 그해 7월부터 뇌성마비 장애인 축구 전북 대표팀을 맡아 지도했다. 당시 김 감독은 "잘하는 애들을 데려다가 성적을 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축구를) 못하는 애들을 데려다 훌륭한 선수로 키우는 게 진짜 지도자"라며 "축구의 문외한이나 변방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축구의 즐거움'을 알리고 보급하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인이 피땀 흘려 키운 삼례여중 축구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지 못한 채 2014년 11월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든 삼례여중 축구부도 창단 20년 만에 공중분해됐다. 삼례여중은 지난 3월 10일 학교운영위원회를 열어 축구부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올해 삼례중과 통합돼 신축 학교로 이전하면서 더는 선수단 숙소 운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선수 학부모들은 새 학교에 기숙사를 못 두면 기존 삼례여중 숙소와 운동장이라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학교와 전북교육청 측은 초·중학교는 운동부 합숙소 설립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들며 의견 차를 좁히지 못했다.

 10명에 가까운 타 지역 출신 선수 대부분은 여자 축구부가 있는 다른 시·도 학교로 전학 가거나 아예 축구를 그만둔 것으로 확인됐다. 일각에서는 삼례여중 축구부 해체는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화 '슈팅걸스' 한 장면. [사진 전북교육청]

영화 '슈팅걸스' 한 장면. [사진 전북교육청]

 김 감독이 지휘봉을 놓은 이후 7~8년간 삼례여중 축구부는 전국 대회에서 1승조차 거두기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학부모 일부가 선수 출전과 축구부 운영에 지나치게 간섭하면서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 때문에 2년 이상 버틴 감독이 없었다고 한다.

 선수 수급에 어려움을 겪다 보니 엔트리(경기 참가 명단)를 채우기 위해 일반 학생들을 선수로 등록해 소년체전 등에 출전했다. 그나마 선수를 공급하던 삼례중앙초 여자 축구부마저 수년 전 해체되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이제는 삼례여중마저 해체돼 전북에 남은 여자 축구부는 한별고가 유일하다.

 체육인들은 "삼례여중 축구부 해체는 이 학교와 전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 축구 등 국내 비인기 종목 전체의 문제이자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치권에서는 학교 운동부 현실에 맞게 제도를 보완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변호사 출신 두세훈 전북도의원(완주2)은 지난달 27일 제371회 임시회 1차 본회의에서 "삼례여중 축구부 해체처럼 원거리 학생 선수를 위한 기숙사 운영 없이 합숙소가 폐지돼 많은 학교 체육부가 해체 위기를 겪고 있다"며 정부에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촉구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체육 특기생이 같은 지역에 동일 체육 특기 종목을 육성하는 중학교가 없는 경우 거주지 외 중학교로 입학을 허용해야 한다'는 취지다.

 두 의원은 "거주지 외 관할 지역 전·입학 가능 여부와 관련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69조 해석을 놓고 전북교육청 등 7개 교육청은 불가능하다고 해석한 반면 서울교육청 등 10개 교육청은 가능하다고 해석한다"며 "법제처와 국가인권위원회도 전·입학 범위를 한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했다.

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고(故) 김수철 감독은 누구

최약체로 평가받던 삼례여중 축구부를 2009년 소년체전 준우승, 여왕기 우승으로 이끈 '명장'(名將)이었다. 지난 2014년 11월 13일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세.

김 감독은 전주완산초 4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전주해성중과 전북체고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노는 게 재미있어서 축구를 접었다"고 한다.

"선수 생활을 열심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도자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는 그는 32살에 당시 전북축구협회 전무이사가 '젊은 사람이 축구협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설득해 경기이사 10년, 전무이사 4년 등 14년간 축구협회 살림을 꾸렸다.

그러다가 2000년 4월 도내 최초로 삼례여중에 여자 축구팀을 창단, 첫 지휘봉을 잡았다. 그리고 2005년 이 학교를 소년체전 준우승과 청학기 준우승으로 이끈 뒤 2006년 고창중 축구부를 잠시 맡았다가 2008년 11월 다시 '친정'인 삼례여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김 감독은 시합 참가 자격이 있는 13명-이중 2명은 신입생-을 데리고 소년체전 준우승과 여왕기 우승이라는 기적을 일궜다. 당시 타 시·도 지도자들은 얇은 선수층과 맨땅에서 훈련해야 하는 척박한 환경에서 전국 대회 우승까지 거머쥔 삼례여중을 '연구 대상'이라고 했다.

영화 '슈팅스타'로 만들어진 삼례여중의 감동적인 우승은 제자들과 숙소에서 동고동락하며, 시합과 전지 훈련마다 '버스 기사' 노릇까지 도맡았던 김 감독의 공이 절대적이었다는 게 축구계의 중론이다.

김준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