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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흑인여성 무시한 세상에 하이킥 날린 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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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현예슬의 만만한 리뷰(82) 영화 '히든 피겨스'

우리는 누구나 ‘처음’에 대한 설렘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사랑, 첫 키스, 첫 입사… 어떤 명사에 ‘처음'을 넣게 되면 그 의미가 남달라지죠. 반면 두려움도 공존합니다. 시작에 대한 두려움인데요. 만약 첫 직장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인이 된다는 설렘과 함께 내가 과연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잘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있죠.

오늘은 그 ‘처음'이라는 역사를 쓴 세 명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흑인, 여성이라는 장벽을 넘어 전설이 된 그녀들의 이야기 영화 ‘히든 피겨스’ 입니다.

나사에서 ‘처음'을 쓴 세 명의 흑인 여성들

미국 항공우주국 나사에서 ‘처음'을 쓴 세 명의 흑인여성들. 왼쪽부터 메리 잭슨(자넬 모네 분), 캐서린 존슨(타라지 P.헨슨 분),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분).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 항공우주국 나사에서 ‘처음'을 쓴 세 명의 흑인여성들. 왼쪽부터 메리 잭슨(자넬 모네 분), 캐서린 존슨(타라지 P.헨슨 분),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분).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냉전시기, 현재 러시아에서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에 러시아보다 먼저 우주로 인간을 보내겠다며 시작한 ‘머큐리 계획'에 등장한 세 명의 흑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수학자 캐서린 존슨(타라지 P.헨슨 분)과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분), 엔지니어 메리 잭슨(자넬 모네 분)이죠. 이들을 주인공으로 영화가 펼쳐집니다. 예전에 소개해드린 적 있는 영화 ‘그린북'과 ‘헬프'를 보면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세 명의 주인공들은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와 냉대는 물론 능력이 있어도 기회조차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함으로써 인정받게 됩니다.

그 과정을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잡았습니다. 당시 같은 시기에 개봉했던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를 밀어내고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으니까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각색상, 여우조연상 후보로도 올랐지만 안타깝게도 ‘문라이트'에 밀려 수상은 하지 못했습니다.

영화에 반한 결정적 장면 세 가지

캐서린이 우주선 궤도 계산을 하고 있다. 천재들만모아논 백인 남성 팀에서 유일한 흑인 여성으로 천재성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캐서린이 우주선 궤도 계산을 하고 있다. 천재들만모아논 백인 남성 팀에서 유일한 흑인 여성으로 천재성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론 인물별로 소름 돋았던 장면이 있습니다. 먼저 캐서린의 경우, 업무 중 계속 자리를 비우자 팀장이 맨날 어디를 그렇게 가냐며 묻습니다. 나사에서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때문에 백인과 흑인이 함께 화장실을 쓸 수 없었는데요. 그래서 캐서린이 흑인 화장실을 찾아가려면 건물 밖으로 나가 800m를 걸어야 했죠.

이때도 비 내리는 와중에 화장실 다녀온 캐서린은 쫄딱 젖은 채로 해리슨과 팀원들에게 외치는데요. 이 장면에서 캐서린의 울분이자 당시 모든 흑인 여성들의 서러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정을 알 리 없던 팀원들은 그제야 캐서린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도로시가 자신의 팀 전체를 이끌고 백인들이 일하는사무실로 입성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소름끼쳤던 장면.

도로시가 자신의 팀 전체를 이끌고 백인들이 일하는사무실로 입성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소름끼쳤던 장면.

다음으로 도로시의 경우, 직책상 관리자는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관리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계산 보조원으로 일하는 흑인 여성들의 업무를 배정해주고 총괄하는 업무를 했죠. 어느 날 회사에 IBM 슈퍼컴퓨터가 들어오게 되자 자신과 자신의 팀이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리란 걸 깨닫게 됩니다. 계산 능력으로는 슈퍼컴퓨터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자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독학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팀원들에게도 틈틈이 가르쳤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나요. 이후 나사에서는 비정규직이였던 그를 먼저 찾았고 그는 자신의 팀 전체를 이끌고 백인 사무실로 입성하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환호성이 나왔습니다.

엔지니어 팀에 발령받은 메리(오른쪽)가 팀장에게 정규 교육 이수를 제안 받는 장면. '최초'가 되는 '최초'의 순간이다.

엔지니어 팀에 발령받은 메리(오른쪽)가 팀장에게 정규 교육 이수를 제안 받는 장면. '최초'가 되는 '최초'의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메리 역시 계산원이었는데 업무 배정 중 엔니지어 팀에 발령받게 됩니다. 원래 엔지니어에 재능이 있었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기했는데요. 팀장이 그 재능을 알아보고 정규 교육 이수를 주장했죠. 이후 그는 백인들만 입학 가능한 고등학교에 입학을 허가해 달라는 청원을 내 승소합니다. 그렇게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탄생하게 되죠.

메리는 법원에서 판사에게 자신의 입학을 허가하게 되면 판사 역시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져가는 거라며 설득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자신의 꿈을 위해 좌절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모습이 멋졌습니다.

1700만 관객 역사를 쓴 영화 ‘명량'을 보면 주인공 이순신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죠.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시작이 가져오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면 영화 ‘히든 피겨스'의 세 주인공처럼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도 용기있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히든 피겨스

영화 '히든피겨스' 포스터.

영화 '히든피겨스' 포스터.

감독: 데오도르 멜피
원작: 마고 리 셰털리 ‘히든 피겨스: 미국의 우주 경쟁을 승리로 이끈, 천재 흑인 여성 수학자 이야기'
각본: 엘리슨 슈로더, 마고 리 쉐터리
출연: 타라지 P.헨슨, 옥타비아 스펜서, 자넬 모네
촬영: 맨디 워커
음악: 벤자민 월피쉬, 퍼렐 윌리엄스, 한스 짐머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27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일: 2017년 3월 23일

중앙일보 뉴스제작1팀 대리 hyeon.yese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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