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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금융 게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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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저는 입이 없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2001년 12월의 한 늦은 밤, 정성홍 전 국가정보원 과장의 입에서 묘한 발언이 나왔다. 주가조작 무마 등 대가로 억대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기 직전 도열한 취재진과 카메라를 향해 90도로 몸을 숙이면서였다.

‘충성 맹세’ 대상이 ‘진승현 게이트’로 불린 해당 사건의 ‘몸통’이었음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해리포터』의 악당 ‘볼드모트’처럼 누구도 그 존재를 입에 올릴 수 없는 존재의 실존이 확인된 듯해 꽤 오싹했던 기억이 있다.

‘희망찬 21세기’의 초입은 기대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정현준, 진승현, 윤태식, 이용호 등 생소한 이름들로 장식된 이른바 ‘금융 게이트’가 줄줄이 터졌다. 야합한 권력과 금융이 ‘얼굴마담’을 내세운 뒤 주가조작 등을 통해 자금을 뻥튀기해 나눠 가진 것 아니냐는 게 금융 게이트 시나리오의 얼개였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주가가 폭등하던 IT 거품의 절정기를 보냈던 터라 개연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몸통이 규명된 적은 없었다. 최고 권력자라는 추정과 전언이 나온 적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일단 의혹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금융 범죄는 과장(誇張)을 먹고 자란다. 눈먼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정·관계 인맥을 들먹였을 수 있다는 얘기다. 몸통에 이르는 길을 막아선 ‘충신’들도 넘쳐났다. 최고 권력자의 측근과 정보기관 및 금융감독기관 간부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수사기관도 의심스러웠다. 당시의 검찰은 정권의 호위무사였고, 대형 권력형 비리 사건을 적당한 선에서 끊는 데 최적화된 조직이었다.

라임 펀드 환매중단 사태의 핵심들이 속속 구속되면서 또 하나의 금융 게이트가 출발선에 선 듯하다. 200억원대에 불과했던 라임자산운용 자산이 불과 몇 년 사이에 5조6000억원대로 폭증했다는 점, 거액이 빼돌려져 증발했다는 점 등 게이트의 자격 요건은 충분히 갖췄다.

더구나 지금의 검찰은 과거와 달리 정권과의 일전을 불사하고 있다. 수사기관의 진정성은 수사 성패를 가를 수 있는 핵심 요소다. 그러니 수사를 한번 지켜보자. ‘진짜 볼드모트’가 튀어나오지 말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