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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광주, 백화문에 능해 1930년대 한·중 문학 가교 역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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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호 19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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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설영(文藝雪影)』誌(지)에 發表(발표)된 金光洲(김광주) 氏(씨)의 ‘朝鮮(조선) 文壇(문단) 紹介(소개)’를 주어 읽다. 氏의 白話文(백화문)의 能(능)함에는 놀랏다.”

한국 무협소설 대부, 김훈의 아버지 #상하이 시절에 쓴 작품집 모아 펴내 #김훈 “망국의 굴레 못벗어 고통받아”

인용문의 ‘문예설영’은 1930년대 중국의 순문예잡지, 김광주(왼쪽 사진)는 한국 무협소설의 대부격인 소설가 김광주(1910~1973)씨다. 이 잡지에 김광주의 글이 실렸는데, 중국어 구어체 문장인 백화문 구사가 놀라울 정도로 유창했다는 얘기다.

인용문을 쓴 사람은 농촌소설 ‘제1과 제1장’으로 알려진 소설가 이무영(1908~1960). 그가 동아일보 1935년 5월 2일 자에 게재한 영남지방 기행문 ‘영남주간기(嶺南走看記)’의 한 구절이다. 김광주가 신문기자, 베스트셀러 무협소설 작가만이었던 게 아니라 1930년대 한국 문학판 사정을 중국에 소개하는 지식 교류 역할도 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는 김광주는 의사가 되기 위해 중국 상하이의 남양의대에 진학했으나 문학에 뜻을 품고 중퇴했다. 1930년대 상하이와, 당시 북평(北平)으로 표기했던 지금의 베이징에서 평론가·시인·소설가로 활동했다. ‘평(萍)’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중국 문학작품을 고국에 번역 소개하거나 중국의 신문예운동 등을 고국에 전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문학 작가 루쉰의 ‘행복한 가정’ 같은 작품을 그가 번역했다. 물론 인용문처럼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61년 중국 무협소설을 바탕으로 한 국내 첫 무협소설 『정협지』를 경향신문에 연재한 이래 최고의 무협소설 작가로 군림했던 시기 한참 전 중국에서 벌인 일들이다.

김광주 자료집

김광주 자료집

그동안 김광주 문학의 의미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1930년대 상하이 시절 김광주의 실체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길이 마땅치 않았다.

이번에 궁금증이 풀리게 됐다. 상하이 시절 썼던 그의 글들을 묶어 단국대 일본연구소 HK+ 사업단이 『김광주 작품집(한글편)』(안나푸르나)을 펴냈다. 사업단의 김경남 연구교수와 산동대 김철 교수가 조선·동아일보, 조선문단·신동아 등을 뒤져 이 시기 그의 번역물·평론·소설·시 등을 최대한 모았다. 단편소설 ‘上海(상해)와 女子(여자)’, 산문 ‘故鄕(고향)에 남기고 온 꿈’, 시 ‘저무러가는 거리에 서서’ 같은 작품들이 보인다. 한·중·일 지식 교류의 역사를 연구해 동아시아 지식 인문학의 기초 자료로 삼겠다는 취지다(단국대 허재영 일본연구소장). 김광주가 백화문으로 쓴 자료집 2권도 곧 출간된다.

대중성이나 작품성에서 아버지 이상 가는 작가가 된 아들 소설가 김훈은 작품집 ‘아들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혈육의 인연이라는 사사로움이 부끄럽지만, 망해버린 조국을 향한 그리움이 너무나 괴로워서 그 굴레를 벗어던지려 했으나 벗어지지 않아 고통받았던 청년 아버지를 생각하면 슬퍼진다고.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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