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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시험 망쳐놓고 “채점 잘못됐다”고 호통치는 통합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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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4·15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은 여전히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 황교안 대표는 사퇴하면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나라가 잘못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했다. 이석연 공천관리위원장 권한대행은 “국민의 선택에 절망했다”며 “정권의 폭주를 막지 못한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되돌아 올 것”이라고 했다.

반문·기득권 유지를 보수로 착각 #극우 언행 거듭하다 ‘분리수거’ 돼 #이대로 대선 가면 당이 소멸될 판 #부끄러움 알고 변화 수용해야

실컷 놀다가 시험을 망친 뒤 “채점이 잘못됐다”고 선생님을 호통치는 격이다. 참다 못해 주류세력을 교체한 민심을 전혀 못 읽고 있다. 김세연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이고, 생명력을 잃은 좀비 같은 존재” 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통합당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했다.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의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다. 엄마와 어린 남매는 수시로 출몰하는 귀신을 보고 공포에 떤다. 실은 자신들이 귀신이었다는 끔찍한 반전을 감당할 수 없는 일가족은 “우린 안 죽었어”라고 일제히 울부짖는다. 지금 통합당은 “우리가 옳아. 국민이 멍청해”라고 외치고 있다. 범부(凡夫)의 판단을 무시하는 엘리트의 오만이다.

보수 야당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객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3년 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된 것은 새누리당의 탄핵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탄핵 정권의 총리 황교안을 간판으로 내세웠고, 친박과 태극기부대가 그를 에워쌌다. 5·18망언, n번방 호기심, 세월호 유가족 모욕, ‘30·40 비하’ 발언이 쏟아졌다. 낡은 틀에 갇혀 변화를 읽는 감수성을 상실하고 사유의 빈곤을 겪은 결과다. 이렇다 할 정책과 철학도 없었다. 민심이 싸늘해진 이유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낙선한 통합당 30대 후보자들은 “당이 높아진 유권자들의 수준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극우적 언행을 거듭하다가 국민들에게 ‘분리수거’당했다”고 했다. “세대·인물·철학을 모두 바꾸지 않으면 다음 대선에서 당이 아예 소멸할 것” “1970~80년대의 반공이념 스타일로 외친 ‘문재인 좌파독재’는 전혀 유권자를 설득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눈에 조국이 악당이었다면 우리 당은 괴물 또는 쓰레기였던 것 같다” “극우세력과 영남중심주의와도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나라에 보수세력은 있지만 보수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공·기득권 사수·변화 거부가 꽉 막힌 꼰대보수의 특징이다. 이건 보수가 아니다. 에드먼드 버크는 ‘보수주의 경전’이라는 1790년의 저작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관습과 전통이 한 세대나 개인의 추상적 이성보다 훨씬 깊은 통찰력을 지닌다고 했다.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하고 기존 질서를 무차별 파괴했다는 이유로 1789년의 프랑스혁명에 반대했다.

하지만 “약간을 변화시킬 수단을 갖지 않는 국가는 보존을 위한 수단도 없는 법이다”며 점진적 개혁은 수용했다. 자유를 향한 미국 독립혁명과 영국 명예혁명, 루터의 종교개혁을 모두 지지했다. 어떤 변화도 거부하는 한국의 보수가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통합당 낙선자들은 “중도층은 이미 민주당을 보수당으로 인식한다”고 민심을 전했다. 통합당이 극우가 됐다는 진단이다.

통합당은 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소용돌이치는 민심의 바다에 몸을 맡기고 그들의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민주당은 이걸 먼저 해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타적 공감 능력을 갖췄다. 남북화해와 사회적 약자 보호 정책은 허점이 많지만 유권자 다수가 동기를 이해했다. 통합당이 ‘강남당’ ‘영남당’에서 벗어나려면 당의 외연도 넓혀야 한다. 영국 보수당은 19세기 후반 디즈레일리가 노동자들을 품어 ‘모든 계급의 정당’으로 거듭났다. 그래서 ‘노동계급만의 정당’인 노동당보다 유리한 지형을 확보했다. 통합당이 추구해야 할 길이다.

한국 보수의 성공 사례도 연구해야 한다. 세계 최빈국 대통령 이승만은 건국 직후 예산의 10%나 투입해 초등교육을 의무화해 문맹률을 낮췄다.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농지개혁으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확립했다. 노예나 다름없었던 소작농이 내 땅을 갖게 됐다. 한국 최초의 혁명적 경제민주화 조치였다.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은 농민들은 한국전쟁 때  적화통일에 반대했다. 박정희는 산업화를 성공시켰다. 이승만의 무상교육을 받은 우수한 근로자 집단, 농지개혁으로 경제주체가 된 자작농이 원동력이 됐다.

노태우는 최초로 평화적 통일방안과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었다. 레드 컴플렉스 때문에 진보세력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세 대통령은 보수가 할 수 있는 역사적 소임을 해냈다.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지금의 반공보수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미래는 보수야당의 회생 여부에 달려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선량한 이들의 수수방관은 악이 승리하는 데 유일한 조건이다”고 했다. 안보를 튼튼히 하고, 기업을 살리고 경제를 일으키는 정책은 보수야당이 앞장서야 한다. 통합당이 극우세력과 결별하고 ‘정의롭고 따뜻한 보수주의자’ 중심의 열린 보수로 거듭나기 바란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