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고향 기부제가 있었더라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오영환 지역전문기자·대구지사장

오영환 지역전문기자·대구지사장

전국에 지자체 주관 농산물 특판 행사가 한창이다. 개학 연기와 외식·행사 취소로 채소와 농식품 판매가 뚝 떨어지면서다. 코로나19 감염이 돌출한 대구·경북 농가는 속이 더 까맣다. 과학을 비웃는 뜬소문 손해마저 입었다. 제철 농산물을 두고 온라인 판매만 바라볼 수 없는 처지다. 지역 자체 소비가 절실해졌다. 경북도의 농산물 품앗이 완판 운동은 그 일환이다.

지자체 기부하면 환급과 특산물 #재난 지역엔 성금 루트로 활용 #20대 국회가 계류 법안 처리해야

운동은 지난달 초 관공서 중심에서 농협, 군부대를 넘어 대형 유통업체로 퍼졌다. 보관이 어려운 채소와 과일 농가에 숨통이 트였다. 판매량이 75억원이나 됐다. 경북도는 6개 농촌융복합산업 매장(안테나숍)에서 농식품 특판전에도 나섰다. 10일 경산 안테나숍을 찾아가 보니 꿀 등 1+1 상품이 매진됐다고 했다. 지역 농산물·농식품 소비 운동은 농촌의 시름을 덜어주고 있다.

캠페인을 지켜보면서 떠올린 것은 ‘고향사랑 기부제’다. 누구나 거주지 외 지자체에 기부하면 세액 공제와 더불어 특산물을 받는 제도다. 만성 재정난의 지방엔 더할 나위 없는 원군이다. 재난 지역엔 방파제다. 성금 루트와 지역 특산물 판로가 열린다. 제도가 있었다면 재난 지역을 응원하면서 아픔을 함께 나눈 국민이 적잖았을 것이다. 코로나19에 너나없이 어렵지만, 십시일반(十匙一飯)이 없었겠는가.

제도는 정치에서 출발해 정치의 덫에 걸렸다. 정책 구상은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나왔다. 당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가 도시민의 주민세 10%를 고향에 내는 고향세 도입을 공약하면서다. 그해 일본이 입안한 고향 납세가 모델이었다. 이듬해 18대 국회에선 두 건의 의원입법안이 자동 폐기됐다. 현재의 20대 국회엔 법률 제정·개정안 15건이 제출됐다.

서소문포럼 4/14

서소문포럼 4/14

주요 법률안의 골격은 이렇다. ①지자체 기부금의 세액 공제는 다른 기부금과 같은 수준이다. 10만원 이하는 전액, 10만원~1000만원은 16.5%, 1000만원 초과는 33%다. ②기부받은 지자체는 기금을 설치해 사업에 활용한다. ③지자체는 답례품 제공이 가능하다. 그 종류와 상한은 법으로 정한다.

하지만 법률안은 소관 행정안전소위도 통과하지 못했다. 2018년 9월, 지난해 4월 열린 소위는 겉돌았다. 의사록을 보면 법안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당초의 열의는 온데간데없었다. 정부 측 취지 설명이 주를 이뤘다. 정부는 일본의 예를 들어가며 제도가 재난 극복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피력했다. 소위는 계속 심의를 결정했지만 열리지 못했고, 법률안 자동 폐기가 눈앞이다. 그 새 전국 시도지사·농어촌군수 협의회와 일선 지자체, 농협에서 21건의 제도 도입 촉구 결의안을 냈지만 허사였다. 지방 붕괴와 재난 극복은 국회에서 나랏일 취급을 받지 못했다. 지방에서 보면 국회도 수도권 중심 공화국의 한 장치일 뿐이다.

일본의 고향 납세는 재난 극복 제도로도 자리 잡았다. 누구나 거주지 외 지자체에 기부하면 2000엔(약 2만2500원)을 뺀 나머지를 공제하는 제도다. 기부 상한액은 소득과 가족 관계로 정한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을 보자. 후쿠시마·미야기·이와테 현에 2개월 만에 400억엔의 기부금이 몰렸다. 기부금은 적십자사 등 모금 단체 분도 고향 납세 적용을 받았다. 올 1월 말까지 3개 현에 답지한 기부금은 미야기(2164억엔), 이와테(545억엔), 후쿠시마(380억엔)이다. 제도가 재난 복구와 부흥에 톡톡히 한몫했다. 2016년 구마모토현 지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올 3월까지의 성금은 532억엔이다. 고향 납세의 재난 지원금 루트는 망외의 소득이다. 제도 도입 당시에는 상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의 고향 납세는 지방 살리기 면에서도 성공작이다. 2018년 기부금은 2322만건에 5127억엔이다. 도입 10년 만에 액수가 63배 늘어났다. 지자체의 특산물 등 답례품은 22만개를 헤아린다. 지방에 경쟁 원리도 작동했다. 고향 납세 중개 포털사이트도 10개를 넘는다. 고향 납세는 도시권 세수의 지방 이전도 가져왔다. 기부금은 도쿄·오사카·나고야권의 3대 도시권이 약 70%다. 수도권 단체장의 돈 정치가 판치는 우리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지난해 우리나라 군 단위 기초단체 82곳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18%다. 여기에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이 짓누른다. 고혈을 짜야 할 판이다. 지방에 피가 돌지 않으면 결국 나라가 동맥경화에 걸린다. 이번 국회마저 넘기면 고향 기부제는 모멘텀을 잃을지도 모른다. 총선은 내일이지만 20대 국회 임기는 다음달 말까지다.

오영환 지역전문기자·대구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