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한항공 격추 소련 방공망, 19세 아마추어에 어이없게 뚫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Focus 인사이드 

20세기 들어 비행기가 무기로 사용되면서 전쟁의 방법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포의 사거리 이내만 공격할 수 있었다. 그라나 하늘을 마음대로 날을 수 있게 되면서 승패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적의 중심부까지 쉽게 타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반면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처럼 비행기의 등장과 함께 하늘을 쉽게 이용하지 못 하게 하기 위한 대응책도 함께 출현했다.

[Focus 인사이드] #서독 청년 소련 심장부에 착륙 #‘쏠까 말까’ 고민하며 지켜봐 #한국 여객기는 잔인한게 격추 #미국, 9·11 테러 충돌 지켜만봐

한국 공군의 비상 출격 훈련 모습. 하늘에서 전투기로 적기를 막는 방법은 상당히 오래되었고 여전히 중요한 방어술이다. [중앙포토]

한국 공군의 비상 출격 훈련 모습. 하늘에서 전투기로 적기를 막는 방법은 상당히 오래되었고 여전히 중요한 방어술이다. [중앙포토]

초창기 적기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비행기로 요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대공 전투의 시작은 필연이었다. 요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멀리서부터 교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방법이 바뀌었지만, 전투기 간의 공대공 전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아무리 텅 빈 것 같은 하늘이라도 전투를 펼치는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뛰어난 경보 체계를 갖추었어도 요격기를 미리 띄어 놓기는 힘들다.

그래서 다양한 대공 무기를 사용해 지상에서 적기를 직접 요격하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등장한 최초의 대공포는 요행을 바란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명중률이 형편없었더.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 와서는 적기의 내습을 막는 중요한 수단으로 변모했다. 오늘날은 적진 한가운데까지 포착이 가능한 고성능 경보 체계와 연동된 각종 미사일 등이 임무를 담당하면서 역할이 더욱 커졌다.

1983년 9월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된 대한항공 007기 잔해가 김포공항 창고에 도착 한 모습. 민항기도 망설임 없이 공격했을 만큼 소련의 대응은 잔인했다. [중앙포토]

1983년 9월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된 대한항공 007기 잔해가 김포공항 창고에 도착 한 모습. 민항기도 망설임 없이 공격했을 만큼 소련의 대응은 잔인했다. [중앙포토]

한반도는 종심이 짧다 보니 남북한 모두 상당히 조밀한 방공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사실 대부분 군사 강국의 방공망은 예외 없이 뛰어난 수준을 자랑한다. 그만큼 하늘을 통한 공격은 갈수록 위험한 시대가 되었다. 냉전 시기의 소련도 최고의 방공망을 가진 국가였다. 넓은 국토의 외곽부터 내습하는 적기를 단계적으로 요격할 수 있는 충실한 방공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92년 11월 한국에 국빈으로 방문한 옐친 보리스 러시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1983년 소련 공군에 격추된 대한항공기 블랙박스를 전달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2년 11월 한국에 국빈으로 방문한 옐친 보리스 러시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1983년 소련 공군에 격추된 대한항공기 블랙박스를 전달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8년·1983년 연이어 있었던 대한항공 여객기에 대한 소련의 공격은 두고두고 비난받는 비열한 행위였다. 한편으로 방공에 대한 소련의 의지가 얼마나 무자비하고 엄중한지 알려준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사실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지 냉전 시기에 미군기가 소련의 전투기나 미사일에 격추된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이처럼 대단한 수준으로 평가되던 소련의 방공망이 어이없게 뚫린 사건이 있었다.

아직은 냉전의 대립이 심각하던 1987년 5월 28일 대낮에 세스나 경비행기가 철통 같던 방공망을 뚫고 소련의 심장부인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착륙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더구나 서독인 조종사 마티아스 루스트는 이제 막 조종을 배운 19살에 불과한 아마추어였다. 핀란드 헬싱키를 출발한 그는 소련 영공을 무려 400마일이나 가로질러 백주에 모스크바까지 날아오는 데 성공했다.

루스트는 세스나기를 몰고 붉은 광장에 착륙한 뒤 기체 옆에 여유롭게 서 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 국방장관과 방공군사령관이 해임됐다. [중앙포토]

루스트는 세스나기를 몰고 붉은 광장에 착륙한 뒤 기체 옆에 여유롭게 서 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 국방장관과 방공군사령관이 해임됐다. [중앙포토]

체포 후 루스트는 “동서를 잇는 상상의 다리를 놓기 위해 비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철없는 청년의 즉흥적인 일탈이었다. 한마디로 무서움을 모르고 객기를 부린 것이었다. 소련은 요격기를 출격했고 대공미사일로 조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3년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 당시 국제 사회로부터 맹비난을 당한 경험 때문에 격추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 이런사이 어이없는 이유로 요격 타이밍을 놓쳤던 것이었다.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하는 '9.11 테러' 발생 직전 미국은 항공기 격추를 놓고 고민하다 충돌을 막지 못했다. [사진=AFP=연합뉴스]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하는 '9.11 테러' 발생 직전 미국은 항공기 격추를 놓고 고민하다 충돌을 막지 못했다. [사진=AFP=연합뉴스]

루스트의 비행기가 국경을 넘자마자 곧바로 대응에 들어갔을 만큼 소련의 감시망은 철통 같았다. 하지만 출격한 전투기 조종사로부터 미상의 비행체가 레저용 경비행기임을 보고받자 책임자들은 몹시 당황했다. 모스크바 상공에 허락받지 않은 비행체가 출몰했다는 것은 전쟁에 준하는 사태였다. 그러나 고장처럼 불가피한 비상 상황일지도 모르니 전시처럼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루스트는 착륙에 성공했다.

결론적으로 소련의 감시망이 문제가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에 대한 대비가 미리 준비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에서 알 수 있듯이 찰나의 순간에 요격을 결정하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결론적으로 루스트 사건이나 ‘9.11 테러’는 결국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방공망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려준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