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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 아래에 학살 터가…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주 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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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ㆍ3을 상징하는 꽃 동백. 강요배 화가가 '동백꽃 지다' 연작을 통해 제주 4ㆍ3을 알린 것이 긴 상징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 4ㆍ3 70주년을 맞았던 2018년, 70주년을 기리기 위해 동백꽃 배지를 제작했었다.

제주 4ㆍ3을 상징하는 꽃 동백. 강요배 화가가 '동백꽃 지다' 연작을 통해 제주 4ㆍ3을 알린 것이 긴 상징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 4ㆍ3 70주년을 맞았던 2018년, 70주년을 기리기 위해 동백꽃 배지를 제작했었다.

4월 3일 오늘은 ‘제주 4·3’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제주 4·3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역사다. 이름에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배어있다. 4·3은 폭동이었다가, 최근까지 사건으로 불렸다. 지금은 ‘제주 4·3’이라고만 한다. 2000년 제정된 ‘제주 4·3 특별법’이 내린 제주 4·3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3에 관한 정부의 유일한 공식기록인 ‘제주 4·3 진상조사 보고서(2003)’는 1948년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수준인 2만5000∼3만명이 희생됐다고 추정했다. 희생자의 33%가 어린이·노인·여성이었으며, 희생자의 86%가 토벌대에 의해 발생했다. 토벌대 전사자는 320명으로 집계됐다.

제주도와 4·3평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4·3 유적지를 제주도 지도에 새겼다. 4·3 유적지 대부분이 제주도의 유명 관광지 곁에 있다. 사연을 숨긴 명소도 허다하다. 사진으로 제주 4·3의 유적지를 소개한다.

4·3 평화공원 광장에 설치된 조각상 ‘비설(飛雪)’. 1949년 1월 6일 두 살 젖먹이 딸을 등에 업은 채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은 변병생씨와 아기를 형상화했다. 4·3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4·3 평화공원은 제주 4·3의 심장과 같은 장소다. 2018년 70주기 행사도 여기서 치렀다. 2008년 3월 22일 개관했으며 모두 600억원이 투입됐다. 공원 개장까지 모두 600억원이 들어갔다. 한 해 평균 25만 명이 공원을 방문한다. 1992년 발견 당시의 다랑쉬굴을 그대로 재현한 전시장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이덕구 산전(山田). 1949년 6월 7일 무장대장 이덕구가 최후를 맞기 전까지 숨어 지냈던 장소다. 당시 무장대가 썼던 솥단지가 아직도 녹슬고 깨진 상태로 놓여 있다. 4·3은 이덕구가 죽으면서 사실상 끝났다. 사려니숲 깊숙한 곳에 있다. 숲길 입구에서 1㎞쯤 들어가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다시 숲을 1.2㎞ 들어가면 나타난다. 평소에는 길이 막혀 있다. 1년 내내 4·3을 추모하는 이들의 순례가 이어진다.

1948년 10월 17일 국군 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지역을 출입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무조건 사살한다”는 내용의 중산간지역 소개령을 발표했다.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해 겨울 4·3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사건이 조천읍 북촌리에서 발생했다. 1949년 1월 17일 마을 어귀에서 토벌대 2명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 이에 분개한 토벌대가 북촌리 주민을 학살했다. 이날 하루에만 북촌리 주민 340명이 죽었다. 이 애끊는 사연이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낳았다. 소설은 학살이 있었던 날 시체 더미에 깔려 용케 살아난 여성 ‘순이’의 기구한 삶을 파헤쳤다. 현기영은 1978년 9월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작품을 발표했고, 이후 정보기관에 끌려가 호된 고문을 당했다. 현기영은 4·3을 다룬 소설을 발표하면 화를 입을 것을 알았다. 예정된 고통을 감내한 예술가들이 아무도 발언하지 못하는 4·3을 증언해왔다.

송악산 뒤편 섯알오름 주변의 알뜨르. 1950년 국군은 주민 210명을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일제 검거했다. 그리고 한밤중에 모두 총살했다. 한 명씩 웅덩이에 던지고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7년이 흘렀다. 유족이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살은 문드러졌고 뼈는 엉켜 있었다. 누구의 유골인지 알 수 없어 유골을 가리지 못했다. 결국 두개골과 등뼈 하나씩 짝을 맞춰 한 벌의 유골을 갖춘 뒤 봉분 한 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뼈를 맞춰 모두 132기의 무덤을 조성했다. 그 묘지가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다. 조상은 백 명 자손은 하나인 무덤이란 뜻이다. 알뜨르는 제주 최대 감자 산지다.

제주도 관광 명소 대부분이 4·3 유적지다. 이를테면 제주의 관문 제주국제공항은 4·3 최대의 학살 터였다. 공항 일대 정뜨르는 일상적으로 총살이 집행되던 현장으로, 활주로 옆에서 2006∼2011년 발굴작업에서만 유해 388구가 나왔다.

제주 제1경 성산일출봉도 악명 높은 처형장이었다. 성산일출봉 오른쪽의 우뭇개 언덕과 왼쪽의 터진목은 성산읍 성산리 사람들이 수시로 끌려 나와 총살당한 터였다. 제주민속촌과 해비치리조트가 들어선 표선 백사장 일대 한모살은 표선면 가시리·토산리 사람들이 쓰러진 장소다. 가시리에서만 최소 501명이 목숨을 잃었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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