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러 도움받는 처지된 美, 바이러스가 패권경쟁 판도 흔든다

중앙일보

입력 2020.04.01 07:32

업데이트 2020.04.01 08:48

포린폴리시 "중·러 패권 확장 의도…나쁜 사마리아인을 조심하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보낸 엄청난 양의 멋진 의료물품이 도착했다"며 "나는 아주 행복하게 놀랐다"고 말했다.[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보낸 엄청난 양의 멋진 의료물품이 도착했다"며 "나는 아주 행복하게 놀랐다"고 말했다.[EPA=연합뉴스]

"나는 아주 행복하게 놀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백악관 브리핑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에 엄청난 양의 멋진 의료물품을 보냈다"며 반가워하면서 한 말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세계 최대 신종 코로나 피해국으로 전락한 미국의 현 상황을 대변한 사건이기도 했다. 국가안보전략(NSS) 상 중·러를 세계패권 경쟁국으로 명시한 미국이 두 나라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미·중·러 지정학적 경쟁의 판도를 흔들고 있는 셈이다.

시진핑·푸틴 앞다퉈 의료물자 보내,
미국 세계 패권 경쟁국에 원조받아
중국 우한 봉쇄 등 "독재 모델 수출"
러시아, 생화학전팀 이탈리아 보내,
나토 미군기지 코 앞에 배치하기도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중국 의료물자는 전날인 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해 뉴욕 JFK공항에 도착한 80톤 분량의 의료 장비를 말한다. N95 마스크 13만개와 안면보호구 180만개, 장갑 1000만개, 체온계 수천개 등이 뉴욕 전역에 배포됐다. 4월 초순까지 21번 더 중국산 의료장비를 가득 실은 항공기가 도착할 예정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는 중국 정부 차원의 기부가 아니다. 실제론 제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과 미국 민간 기업이 제휴해 중국 공장에서 사들인 장비들이다. 모든 나라의 의료장비 생산능력이 포화 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3월 중순부터 확산이 잦아든 중국이 전 세계 물량의 50% 이상 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 회장이 마스크 1백만개와 진단키트 50만개를 기부한 뒤론 중국이 생산한 의료장비를 놓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구매 경쟁까지 벌이고 있다. 국제적 품귀현상을 빚고 있는 산소호흡기는 유럽 각국이 9월까지 중국 생산 물량을 입도선매한 상태다.

신종 코로나 원조 경쟁을 벌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AP=연합뉴스]

신종 코로나 원조 경쟁을 벌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AP=연합뉴스]

지난 2월 7일 미국 국무부가 17.8톤 분량의 마스크·가운·거즈 등 의료장비를 중국 우한에 보낸 뒤 딱 7주 만에 상황이 역전된 셈이다. 러시아 역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통화한 당일인 지난달 30일 비행기 한 대 분량의 의료장비를 미국에 기부했다.

주요국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추이. 그래픽=신재민 기자

주요국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추이. 그래픽=신재민 기자

흥미로운 점은 신종 코로나 피해 통계상으로 중국과 러시아가 표면적으로 바이러스를 가장 잘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존스홉킨스의대에 따르면 31일 0시 현재 미국이 누적 확진자 16만 4603명(사망 3170명)으로 피해가 가장 크다. 2위와 3위는 각각 이탈리아(확진자 10만 1739명, 사망자 1만 1591명)와 스페인(확진자 8만 7956명, 사망자 7716명)이며, 지난해 12월 바이러스 최초 발병국 중국은 8만 2240명(사망 3309명)의 확진자로 4위다.

이어 독일, 프랑스, 이란, 영국,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순인데 피해 1~11위 국 가운데 중국·이란 두 나라를 제외하곤 미국과 유럽 서구 민주국가다. 반면, 세계 최대 면적의 러시아는 감염 1836명에 사망자는 9명에 불과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피해가 작다.

중국이 1월 23일 인구 1000만명이 넘는 우한을 봉쇄할 때만 해도 전 세계는 독재 조치라고 비난했지만 이후 바이러스 확산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이젠 세계가 모방하고 있다. 이탈리아에 이어 미국도 주 정부 차원에서 강제 재택 명령을 내린 상황이다.

반정부 시위가 연일 벌어졌던 칠레는 신종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공공 광장에 군대를 배치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시민의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승인하는 등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은 이번 사태를 권력 장악의 계기로 활용한다고 뉴욕타임스는 지적했다.

피오뉴알라 니 아올라인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은 "우리는 보건 전염병이 끝나기도 전에 권위주의와 억압적 조치라는 전염병이 동시에 퍼지는 것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방부가 파견한 러시아군 방역 전문가가 이탈리아 동북부 베르가모에서 소독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배치된 베르가모에서 두 시간 거리에 나토군 미군기지가 위치해있다.[AP=연합뉴스]

러시아 국방부가 파견한 러시아군 방역 전문가가 이탈리아 동북부 베르가모에서 소독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배치된 베르가모에서 두 시간 거리에 나토군 미군기지가 위치해있다.[AP=연합뉴스]

거꾸로 중국과 러시아는 가장 활발한 구호 활동으로 국제적 입지를 넓히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탈리아에 350명의 중환자실 의료진을 파견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9대의 항공기와 100명 전문가를 급파했다.

포린폴리시는 하지만 떠들썩한 선전 효과에 비해 실제 원조 규모는 너무 작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물자도 상당수 포함됐다고 지적했다. 의료 원조의 일부는 직접 미국과 패권 경쟁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의심되는 활동도 포함됐다.

엘리자베스 브로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 국장은 "나쁜 사마리아인을 조심하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중국 정부가 3월 12일, 25일 이탈리아에 보낸 장비 가운데 산소호흡기는 불과 70대로 10만명 이상 감염되고 1만명 이상 사망한 나라에는 "새 발의 피"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더 심했다. 보건부가 아닌 국방부가 지원한 물자 80%가량은 신종 코로나와 무관한 세균전에 사용되는 살균 장비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장비와 함께 파견된 러시아 군사의료진은 나토군 미군기지와 두 시간 거리의 이탈리아 동북부 베르가모 시 방역작업을 맡아 정보수집용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았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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