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조대 적자인데 또? 한전 비명에 '전기료 할인' 포기한 정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피해를 본 취약계층을 선별해 다음 달부터 3개월간 전기요금 납부를 유예해주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기료 등 공과금의 유예 또는 면제에 대한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문했지만, 면제는 빠졌다. 정부는 “기존 다양한 요금할인 제도가 있어 고려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급속히 추진된 에너지 전환 사업과 온실가스 배출권 등으로 적자 늪에 빠진 한국전력의 여력이 부족한 것도 면제 조치를 불가능하게 한 주된 이유로 꼽힌다.

소상공인·저소득층 1조2600억원 전기료 '유예'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제3차 비상경제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제3차 비상경제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30일 제3차 비상경제회의를 열고, 소상공인·저소득층의 전기요금 납부를 3개월 유예해주기로 했다. 4~6월 청구분에 한해 7~9월로 전기요금 납부를 연기 할 수 있게 된다. 유예기간이 끝난 후에도 올해 말까지 분할 납부가 가능하다.

소상공인의 경우 상시근로자가 5인 미만인 사업자가 대상이다. 광업·제조업 등의 경우는 10인 미만까지 포함된다. 2018년 한전이 복지할인을 적용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차상위계층, 장애인, 독립·상이 유공자와 같은 저소득층도 유예 혜택을 받는다. 정부는 소상공인 총 320만호와 저소득층 157만2000호가 유예 혜택을 받을 것으로 추산했다. 유예되는 전기요금 규모는 1조2576억원이다.

계약전력이 20kW 이하인 소상공인은 별도의 서류가 필요 없다. 저소득층 역시 한전이 2018년 할인 혜택을 적용했던 복지할인 가구 정보를 갖고 있어 별도의 서류를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계약전력 20kW가 초과하는 소상공인은 소상공인확인서를 준비해야 한다.

정부, "기존 혜택 있어 면제는 고려 안 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 세 번째)이 3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3차 비상경제회의 결과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주요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 세 번째)이 3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3차 비상경제회의 결과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주요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문 대통령이 지난 24일 2차 비상경제회의에서 공과금 유예·면제를 주문한 데 따른 것이다. 문 대통령은 “개인에게는 생계 지원이면서 기업에는 비용 절감으로 고용 유지를 돕고자 하는 것”이라며 “어려운 기업들과 국민께 힘이 될 수 있도록 4월부터 바로 시행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주문과 달리 전기요금 면제는 제외됐다. 정부는 “2019년 기준 1조5000억원이 넘는 기존의 요금할인 제도가 있어 감면 조치는 고려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전이 이미 9282억원 규모(이하 2019년 기준)의 특례할인과 기초수급자 등에 대해 5712억원 수준의 복지할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이유다. 2843억원 규모의 주택용 하계(7~8월) 누진제 할인까지 포함하면 1조7000억원 이상이다.

메르스 때는 할인했지만

연도별 한전 영업이익.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연도별 한전 영업이익.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러나 정부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여파가 있던 2015년 7~9월에 약 650만 가구에 대해 전기요금 할인 혜택을 줬다. 메르스보다 경제적 충격이 더 크다고 분석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전기요금 할인을 주저한 데는 그간 누적된 한전의 대규모 적자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전은 지난 2016년과 2017년에는 각각 12조16억원과 4조9532억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연결기준)을 기록했다. 그러나 2018년과 2019년에는 각각 2080억원과 1조3566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영업적자 규모는 2008년(2조7980억원 적자) 이후 11년 만에 최대다. 문 정부 출범 이전 80~90%에 달했던 원전 가동률이 여전히 70% 초반으로 낮은 데다 온실가스 배출권, 미세먼지 감축을 위한 탈(脫) 석탄 정책도 영향을 미쳤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급속한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적자가 늘어난 데다, 전기요금 현실화를 차일피일 미루며 한전의 여력을 모두 소진해 버린 상황”이라며 “코로나19로 정작 소비자들이 혜택을 봐야 할 때 제대로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한전은 국내뿐 아니라 미국 뉴욕 증시에도 상장된 공기업인 만큼,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요금 인하 정책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것도 이유로 거론된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해 9월 한전에 '2018년 적자를 낸 원인과 한국 정부의 전기요금 인상 전망을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 할인 정책이 지속한다면 배임 문제까지 불거질 수 있다.

"한전 적자 지속할 가능성" 

산업용 전력판매량 10개월 연속 감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산업용 전력판매량 10개월 연속 감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당초 한전은 적자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오는 6월까지 정부와 전기요금 체계개편을 마친다는 입장이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요금 체계개편은 계속 논의 중인 것으로 안다”면서도 “현재는 코로나19로 사용자의 전기요금 부담을 줄여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밝혔다. 경기 침체로 전체 소비전력의 55.6%를 차지하는 산업용 전기 판매 역시 10개월 연속 감소한 상황이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원전 등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원(電原) 비중을 늘리지 않으면 향후 한전의 적자는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조치로 취약층의 부담은 덜 것으로 보이지만, 신·재생에너지 전환 속도를 늦추는 등 지난 에너지 정책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종=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