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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쥔산 회유 실패한 쉬자툰, 진융 집 만남 엉터리 기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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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9호 32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9〉

1997년 7월 1일 0시, 영국은 홍콩을 중국에 반환했다. 육, 해, 공 3군이 동시에 진입했다. 6월 30일 밤, 홍콩진입을 대기하는 중국인민해방군 홍콩주둔 부대. 한국전쟁 시절 중국지원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천껑의 아들이 지휘했다. 그날 밤비가 내렸다. [사진 김명호]

1997년 7월 1일 0시, 영국은 홍콩을 중국에 반환했다. 육, 해, 공 3군이 동시에 진입했다. 6월 30일 밤, 홍콩진입을 대기하는 중국인민해방군 홍콩주둔 부대. 한국전쟁 시절 중국지원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천껑의 아들이 지휘했다. 그날 밤비가 내렸다. [사진 김명호]

신화통신홍콩분사는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일국양제를 천명하자 분주해졌다. 홍콩의 국민당 기구 책임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방법을 놓고 내부토론이 벌어졌다. 분사 사장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은 일단 해보는 성격이었다. 10월 1일 열리는 국경일 기념 축하연에 초청장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반대의견이 많았다. “홍콩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래 본 적이 없다”는 것 외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중공과 접촉 원하는 국민당 인사 드러나

쉬자툰 “그가 먼저 만나자 요청 #국제경기 대만 명칭 문제 해결” #선쥔산 구술과는 정반대 주장 #일국양제 천명 후 문화교류 늘어 #홍콩 신화통신, 양안 영화인 연결 #대만 영화 여러편 대륙서 찍어 성공

홍콩 반환 첫날 도처에 오성홍기와 홍콩특별행정구 깃발이 나부꼈다. [사진 김명호]

홍콩 반환 첫날 도처에 오성홍기와 홍콩특별행정구 깃발이 나부꼈다. [사진 김명호]

최종 결정은 사장 쉬자툰 몫이었다. “우리의 태도와 정책만 표명하면 된다. 오면 아주 좋고, 안 와도 그만이다. 초청장을 보내라.” 훗날 쉬자툰은 미국에서 당시를 회고했다. “18명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홍콩의 국민당 최고 책임자 천즈후이(陳志輝·진지휘), 국민당 당보(黨報) 주간이나 다름없는 홍콩시보(香港時報) 발행인 쩡언풔(曾恩波·증은파) 등은 답변이 없었다. 국민당 중앙위원이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일부는 인편에 정중한 사의를 표했다.” 이 일을 계기로 국민당이 파견한 각 분야 책임자 중에 중공과 접촉을 원하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인편에 안부편지와 작은 선물을 보내왔다. 1997년 홍콩의 대륙반환 이후를 염두에 둔 사람들이었다. 쉬자툰은 끝까지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대만의 문화계 인사들도 제 발로 신화통신 홍콩분사를 찾았다. 영화계 종사자들이 대륙에 들어가 영화 찍기를 희망했다. 이유가 그럴 듯했다. “문혁 전까지만 해도 홍콩 영화는 대륙에 들어가 찍을 수 있었다. 문혁이 발발하자 출입이 수월치 않았다. 한국에 가서 촬영했다. 대만도 그랬다. 한국은 산천이 수려하고 사계가 분명한 곳이다. 서울 근교의 왕릉이나 궁궐, 새로 이전한 대학 캠퍼스 내의 호수 등을 사용했다. 현대판 애정물이라면 모를까, 사극 배경으론 뭔가 어색하다. 중국영화는 대륙에서 찍어야 제맛이 난다.”

통웨줜은 1930년대 경극으로 연예인 생활을 시작했다. 항일전쟁 시절 가명으로 국민당 계열의 반일 지하조직에 참여하는 등 정치색도 강했다. [사진 김명호]

통웨줜은 1930년대 경극으로 연예인 생활을 시작했다. 항일전쟁 시절 가명으로 국민당 계열의 반일 지하조직에 참여하는 등 정치색도 강했다. [사진 김명호]

분사 문화담당 부사장이 양안의 영화인들을 연결했다. 중국은행에 대출도 주선했다. 은행 측은 대만 영화인들을 못 믿었다. 신화통신 홍콩분사에 담보를 요구했다. 손실이 발생하면 ‘신화통신홍콩분사문화예술지원금’ 에서 탕감하겠다는 쉬자툰의 각서 덕에 대만영화 여러 편이 완성됐다. 흥행도 성공적이었다. 대만과 홍콩 배우들의 대륙 행이 줄을 이었다.

대만의 홍콩주재 문화총책 황예바이(黃也白·황야백)도쉬자툰에게 접근했다. 신화통신 분사 문화담당 부사장에게 묘한 청탁을 넣었다. “너희 사장과 영화를 보고 싶다.” 대만에서 촬영한, 항일전쟁 시절 상하이 사변을 다룬 영화였다. 쉬자툰은 거절하지 않았다. 날짜와 시간을 조정하는 동안 베이징 외교부에 의견을 물었다. 외교부도 찬성했다. 약속 하루 전, 황예바이가 황급히 분사에 통보했다. “사정상 배석이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을 참석시키겠다.” 쉬자툰의 회고를 소개한다. “당시 국민당의 홍콩기관 상층부는 나를 함부로 만나지 못했다. 황예바이가 보자고 했을 때 국민당의 홍콩정책이 변한 줄 알았다. 내 판단이 틀렸다. 황의 개인행동이었다.” 쉬자툰도 간부 한 명을 대신 보냈다.

원로배우 통웨줜 5년 공들여 만찬 초청

중공은 대만에서 선쥔산(왼쪽)의 영향력을 높이 샀다. 1981년 가을, 협조를 구하기 위해 선쥔산을 접견하는 행정원장 쑨윈쉬안(孫運璿). [사진 김명호]

중공은 대만에서 선쥔산(왼쪽)의 영향력을 높이 샀다. 1981년 가을, 협조를 구하기 위해 선쥔산을 접견하는 행정원장 쑨윈쉬안(孫運璿). [사진 김명호]

예외도 있었다. 통웨줜(童月娟·동월연)은 1930년대 상하이의 유명한 아역배우였다. 쉬자툰은 항일빨치산 시절 벽촌 가설극장에서 통이 출연한 영화 보고 매료된 적이 있었다. 대만에서 입법위원까지 지낸 통은 남편이 타계하자 홍콩에 정착했다. 20여년간 ‘홍콩영화연극인협회’ 회장 역임하며 연기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행동도 자유로웠다. 무슨 일을 하건 간섭이나 허락받을 필요가 없었다.

쉬자툰은 통웨줜을 극찬했다. “1983년 부임 직후 만찬에 초청했다. 완곡하게 거절당했다. 5년간 명절 때마다 같은 일이 벌어졌다. 1988년, 5년 만에 우리의 초청에 응했다. 80이 다된 명 연예인과의 만찬은 나와 분사 간부들을 감동시켰다. 생활과 영화, 상하이에 있는 옛 친구들을 화제에 올릴 뿐, 정치나 홍콩반환 얘기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통전은 엄두도 못 냈다.” 통웨줜은 정치관이 확고했다. 말년에 상하이나 항저우를 자주 찾았다. 거처를 마련하겠다는 중국 관방의 제의를 거절하고,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2003년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생전에 남긴 유언대로 대만의 남편 묘지에 합장했다. 상하이, 홍콩, 대만, 캐나다에서 열린 영결식이 장관이었다.

대만 4공자 선쥔산(沈君山·심군산)도 통전이 먹혀들어갈 틈이 없었다. 진융(金鏞·김용)과 천주더(陳祖德·진조덕)까지 동원했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쉬자툰도 실패를 인정했다. 선쥔산이 자신을 만나자고 했다는 엉터리 기록을 남겼다. “진융의 전화를 받았다. 선쥔산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기에 바둑도 둘 겸 진융의 집으로 갔다. 천주더와 선쥔산의 대국을 감상하고, 나도 진융과 한판 뒀다. 점심 먹고 잡담 나누던 중 선쥔산이 내게 청탁을 했다.” 내용도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일본에서 열린 아세아 농구선수권 대회에 대만 청년 농구단이 출전했다. 중화타이베이(中華臺北)라는 명칭을 사용하자 대륙 측이 발끈했다. 중국타이베이(中國臺北)를 고집하는 바람에 시합도 못 하고 돌아왔다. 영문표기는 중화나 중국 할 것 없이 모두 CHINA다. 통일은 문화와 체육에서 시작해야 한다. 글자 한 자 놓고 옹졸하게 굴다 보면 통일은 요원하다며 열을 올렸다. 나는 선쥔산의 주장에 공감했다. 국가체육위원회에 건의했다. 이후 대만은 국제경기에 중화타이베이 사용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선쥔산은 쉬자툰과 다른 구술을 남겼다. 내용도 천양지차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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