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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재의 밀담

신종 코로나가 부른 ‘신흥 안보’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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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철재 기자 중앙일보 국방선임기자 겸 군사안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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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장

이철재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장

정부와 군은 매년 가을 ‘생물방어 연습’을 연다. 2011년 시작한 이 연습은 질병관리본부, 국군화생방방호사령는 물론 한·미연합사령부와 주한 미군도 참가한다. 연습 도중 실제 방역 훈련을 벌이기도 하지만 이게 중점은 아니다. 정부와 군의 관계자들이 모여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생물학 테러나 대규모 질병 확산 대응 능력을 점검하고, 그 능력을 향상하는 방안을 함께 찾아보는 도상연습(TTX)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전쟁 같은 안보 위협 #경기 불황 등 사회적 파급 효과 #초국가적 ‘신흥 안보’ 위협 커져 #안보전략 변화에 군 역할 중요

사실 이 연습은 북한의 생물학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지금까진 전염병 발생을 가정한 상황은 짧게 짚고 넘어갔다. 하지만 올해 연습부터는 달라질 전망이다. 전염병 시나리오가 북한 시나리오 못잖게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이다.

코로나19의 급속한 전파가 전 세계를 사실상 전쟁과 같은 안보 위기에 빠뜨렸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코로나19 안보 위기’를 잘 보여줬다. 그는 “전 국민은 필수적인 사유가 아니면 이동을 금하고 자택에 머물러야 한다”면서 두 번이나 “우리는 전쟁 중이다”고 강조했다.

지난 9일 국군화생방방호사령부 장병이 대구 상당동 한마음아파트에서 방역을 펼치고 있다. [뉴시스]

지난 9일 국군화생방방호사령부 장병이 대구 상당동 한마음아파트에서 방역을 펼치고 있다. [뉴시스]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과장이 아니다. 포성이 울리지 않았을 뿐 영토와 영해, 영공을 지키는 군대가 코로나19 방어작전에 긴급 투입됐다. 16일 오후 4시 현재 2793명의 국군 장병이 확진자 진료, 방역·소독에서부터 공항·항만에서의 검역을 맡고 있다. 마스크 5부제로 전국의 약국 앞에 장사진을 치자 마스크 제작(98명), 마스크 포장(71명), 마스크 판매(41명), 마스크 운송 지원(16명) 등 군이 마스크 확보 작전에 돌입하기도 했다. 평시인데도 군이 이처럼 나서는 모습을 보면, 요즘 전시에 준하는 시국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코로나19는 안보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게 했다. 안보는 국어사전에서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라고 돼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안보는 북한이 거의 전부다시피 했다. 그래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북한이 도발하지 않도록 강력한 억제력을 발휘하면 충분했다.

하지만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세계적 유행병)은 그렇지 않다. 팬데믹은 억제가 불가능하다.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변종을 낳기 때문에 일일이 막기가 쉽지 않다. 막는다고 해도 시간과 비용이 든다.

지난 4일 국군화생방방호사령부 특수임무대가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 앞에서 제독 차량을 이용해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지난 4일 국군화생방방호사령부 특수임무대가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 앞에서 제독 차량을 이용해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코로나19는 개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국가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파급 효과를 미친다. 중국과 유럽에선 이동 금지 때문에 지역 사회가 폐쇄하다시피 됐다. 또 공장이 멈추고 경기 불황의 우려가 커지면서 주가가 폭락했다. 1년 내내 세계 각지에서 동맹국과 연합훈련을 벌이는 미군은 잇따라 훈련을 취소하거나 규모를 줄였다. 한·미 연합훈련도 연기됐다. 코로나19를 안보 문제로 다뤄야 할 배경이다.

팬데믹뿐만이 아니다. 사이버·테러·기후변화·자연재해·대규모 난민·식량부족 등 안보를 저해하는 요소들이 수두룩해졌다. 안보의 지평이 넓어지고 복잡해진 것이다. 이런 현상을 국제정치학에선 ‘비전통 안보’ ‘신안보’ ‘포괄 안보’라고 부른다. 정치·군사적 안보의 틀로 보는 안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서울대 김상배(정치외교학) 교수의 연구팀은 ‘신흥 안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신흥은 ‘새롭다(new)’가 아니라 ‘튀어나온다(emerging)’는 의미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신흥 안보는 어느 한순간 돌발적으로 일어나 재빨리 퍼지는 현상을 보인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신흥 안보는 통제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신흥 안보 위협은 세계화·네트워크화를 통해 국경을 뛰어넘는다. 코로나19의 경우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견된 뒤 석 달 만에 전 세계로 퍼졌다.

신흥 안보 위기는 중구난방이 아닌 초국가적 대응이 필요한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코로나19를 놓고 한국을 비롯해 미국·중국·유럽·일본 등 주요 국가별로 따로 움직이고 있다. 전 세계적 협력을 게을리한다면 인류는 더 큰 재앙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정부는 국내적으론 지방 정부, 지역 사회, 기업, 시민 단체 등 다양한 기관·단체와 긴밀한 소통·협력 관계를 쌓아야 한다. 신흥 안보 위기가 미치는 영역은 아주 넓기 있기 때문에 다양한 네트워크만이 대처할 수 있다.

군의 역할도 신흥 안보에선 더 중요해졌다. 전직 국방부 당국자는 “군은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인력과 장비가 있고, 명령이 내려지면 바로 투입할 수 있다”며 “위협의 종류와 상관없이 군은 소방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4월 강원도 고성·속초 산불 때 군이 2개 사단급의 병력을 신속히 보내 진화를 도운 것은 대표적 사례다.

신흥 안보 위기에 맞서 국가 안보 전략의 변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나 군의 모습은 신흥 안보는커녕 전통 안보에도 허덕이고 있다. 특히 군 기지가 민간인에게 잇따라 뚫리자 국방부 장관은 17일 전군 지휘관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지난해도 열었던 회의다. 갈 길이 먼데 제자리마저 지키지 못하는 국방부와 군을 보니 마음이 헛헛해진다.

이철재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장